0. 인트로
다들 삼국지를 한번쯤이라도 보신 경험이 있다면, 제갈량의 북벌 파트에 자연히 관심이 가고, 제갈량과 사마의의 치밀한 지략 대결에 흥미를 보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총 다섯 번, 6년 동안 이루어진 북벌의 결과 촉은 유의미한 전과를 거의 올리지 못했지만, 이 냉엄한 진실은 낭만으로 포장된 연의의 서사와 '아무튼 제갈량 탓은 아님'을 시전하는 정사의 왜곡에 의해 보기좋게 포장되어 왔습니다.
그 정점은 바로 1차북벌의 마속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아시는 것처럼 1차북벌은 촉한이 행했던 역대 그 어느 북벌 중에서도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았고, 촉에게 있어서도 천운이 따라준 북벌입니다. 위나라가 북벌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고, 위나라 최전방 군들이 무려 세개나 통째로 항복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명령으로 출진한 마속의 군대는 가정 위에 진을 치고 장합을 상대했다가 처참하게 패배하고, 진격할 길이 없어진 제갈량은 쓸쓸히 후퇴합니다.
1. 마속에 대한 인식의 문제점
일반적인 삼국지 덕후들이 마속에 대해 가진 인식은 '자만심으로 북벌을 말아먹은 트롤' 정도로 요약됩니다. 그러나, 과연 마속은 독단적으로, 상식적으로 불합리한 판단을 한 것일까요. 삼국지 덕후, 특히 촉을 좋아하는 소위 '촉빠'라고 불리는 분들은 1차북벌 실패의 모든 책임을 마속에게로 돌리고 제갈량 결사옹위를 시전합니다.
하지만, 정사의 기록을 유의깊게 보면, 제갈량을 최대한 옹호해주고자 적극적으로 윤색된 기록 속에서도 그 전쟁의 진실을 발견해낼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속의 행동은 오히려 상식적이었으며, 북벌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은 제갈량에게 있다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2. 1차 북벌을 다시보자
남중을 적당히 평정하고 한중에 주둔한 제갈량은 227년 군사를 내어 위를 침공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출사표를 제출합니다. 그리고 228년 봄이 되자마자 제갈량과 등지로 하여금 아두곡을 통해 기곡으로 향하게 하고는, 촉군이 기곡을 통해 우부풍 지역, 더 나아가 삼보 지방을 직접 타격하려 한다는 헛소문을 냅니다. 이에 위는 옹양주도독 조진이 직접 본대를 이끌고 나아가 기곡에서 조운을 틀어막습니다.
본대인 조진의 발을 묶자, 제갈량의 목적을 달성할 기회가 옵니다. 본대를 이끌고 기산을 공격, 그곳에 진을 차리자, 이 소식을 들은 천수, 농서, 남안의 세 군이 일제히 촉에게 투항했으며, 강족이 촉에 협력할 의사를 밝힙니다. 사서는 이에 대해 관중 전체가 진동했다고 표현합니다. 지금까지의 전개에 대해 맨위 사진을 보고 다시 이해해봅시다.
제갈량은 현재 기산을 점유한 상태이고, 농서, 남안, 천수 세 군이 촉에 투항합니다. 천수태수와 남안태수는 군을 수호하길 포기하고 동쪽으로 달아나는데, 이중 천수태수 마준은 기현을 지켜야 한다는 강유에게 '난 널 못믿겠다'를 시전하고 옹주자사 곽회가 위치한 상규로 달아납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강유는 기현으로 돌아오는데, 기현에서도 주민들이 촉에 투항하길 선택합니다.
이때 제갈량은 농서와 남안을 우선적으로 점유하길 선택하고 소규모 군들을 농서, 남안 방면으로 '흩뿌립니다' 남안군은 쉽게 장악했으나, 농서군은 태수 유초가 결사항전을 선언해 싸워야 할 지경이 됩니다. 하지만 유초가 촉군에게 먼저 동쪽을 평정하면 알아서 항복하겠다고 하자, 농서를 점령하려 온 촉군은 그대로 퇴각합니다.
이때 알수 있는 사실은, 제갈량이 소규모 군대 여럿을 서쪽으로 축차투입했다는 것입니다. 아직 상규와 기현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으니 아마 기산 서쪽을 통해 나아갔을 텐데, 많은 군대가 기곡에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소규모 병력 여럿을 서쪽으로 보내고 나자, 제갈량 휘하에 남은 병력은 그리 많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편, 위에서는 장합을 파견해 제갈량군을 막게 합니다. 위수(사진에서 상규현 위쪽에 흐르는 물길)를 타고 서진한 뒤 남쪽으로 진군한 장합의 군대는 그곳에서 제갈량이 선봉으로 파견한 마속의 선발대를 조우합니다.
장합과 대치하던 마속은 이윽고 점유하던 열류성을 버리고 가정 위에 진을 치고, 거기서 존버를 시전하다 장합의 말려죽이기 작전에 의해 참패, 간신히 몸만 빠져나오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자 제갈량의 군대는 사서의 표현에 따르면 '거점이 없어서 진군하지 못하게 되었고', 위나라의 구원군이 서진해 남안과 농서를 평정합니다. 제갈량은 결국 기현 주민들에게 촉 투항의 주범으로 몰려 배신당한 강유와, 서현에서 뽑아온 1천가와 함께 성도로 돌아옵니다.
3. 1차북벌 전개의 모순점
저 위에 있는 지도를 자세히 봅시다. 농서군과 남안군, 천수군 기현까지 촉에게 투항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서상 표현을 볼때 기현에는 촉군이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멀쩡한 전술 지휘관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접했을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요? 바로 무엇보다도 상규에 주둔한 곽회를 깨뜨리고 상규를 함락하는 것입니다. 그 후 기현을 거쳐 농서로 가 농서태수의 항복을 받아내고 조운의 군대는 다시 한중으로 돌아오기만 해도 손쉽게 농서, 남안, 천수를 장악할 수 있습니다.
1차북벌 당시 제갈량의 군 기동은 굉장히 기이합니다. 지도상 가정에서 훨씬 더 먼 거리인 남안과 농서에는 촉병이 진출해 농서를 함락시키느니 마느니 하고 있는데, 정작 훨씬 가까운 천수에는 도달조차 못하고 마속을 보내 장안에서 진군해온 장합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습니다. 즉 군대를 보내 농서와 남안을 장악한 뒤 그곳의 병사 및 강족을 동진시켜 천천히 진군하는 제갈량의 본대와 합류한 다음, 상규를 떨어뜨린다는 계획을 세운 셈입니다. 이게 정상적인 계획일까요?
정말 유능하고 상식적인 지휘관이라면, 농서와 남안을 장악하고 그곳의 군대와 합친다는 발상은 할수 없습니다. 왜냐면 양주자사 서막이 농서 북쪽에 떡하니 버티고 있기 때문에, 농서와 남안의 병력이 동쪽으로 간 사이에 서막이 이 두 군을 손쉽게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제갈량이 취할 수 있는, 아니 취해야만 했던 최선의 수는 제갈량 본인의 본대가 최대한 빠른 속도로 기동하여 상규를 떨어뜨린 후 장안에서 오는 장합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후 서진에 남안과 농서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갈량은 보신주의를 택했습니다. 이 기이함을 풀기 위해서는, '제갈량 본인이 상규의 곽회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외에는 도출되는 답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상규를 냅두고 장안에서 진군해오는 장합이 가정까지 오는 것을 허용할 정도로 천천히 진군하면서 농서와 남안 따위를 떨어뜨리는 선택을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일개 군 태수에 불과한 유초조차 알고 있었던 당연한 전술을, 제갈량은 택하지 않았습니다.
4. 제갈량은 왜 마속을 구원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위의 무엇보다도 가장 기이한 것은 '제갈량은 왜 마속을 구원하지 않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제갈량은 기현과 상규는 건드리지로 못한 채로 기산에 주둔해 있기에, 가정에서 마속과 대치하는 장합군의 뒤를 제갈량군이 치고 이 틈을 타 마속이 산을 내려가 호응한다면 간단히 장합을 이길 수 있습니다. 혹은, 기현으로 도달해 점유한 다음 상규를 포위한다면 장합은 상규로 퇴각할 수밖에 없고, 장합군의 뒤를 마속군이 따라가 상규에서 제갈량군과 마속군이 장합을 포위해 격파하는 선택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후방에 주둔한 제갈량은 마속이 참패하고 탈출할 때까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습니다. 심지어 마속이 참패한 이후라도 제갈량이 만약 장합과 싸워 이기고 기현이라도 점유한다면 어떻게든 농서와 남안만이라도 점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 모두 하지 않았습니다.
제갈량이 마속을 구원하지 않은것에 대해, '제갈량과 마속의 거리가 멀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비정하는 가정의 위치가 위수 북쪽으로 기산에서 터무니없이 멀다는 점에 것으로 뒷받침됩니다. 그러나, 이는 제갈량전 배송지주에 나온 증언에 의해 반박됩니다. 심지어 이 증언은 진수와 당대인의 증언이기에 신빙성이 높습니다.
“그가 용맹하고 싸움에 능했다는 것은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이 가정(街亭)에 있고 전군(前軍)이 대파되었을 때 제갈량의 둔영이 수 리 떨어져 있었으나 구원하지 않았소. 관병과 서로 접전했으나 또한 천천히 행보하니 이는 그가 용맹했다는 것이오.
제갈량의 둔영과 가정의 둔영은 겨우 수 리밖에 떨어지지 않았기에 제갈량이 멀어서 구원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게다가 제갈량은 기현과 상규 모두 깨뜨리지 못했기에 위수 북쪽으로 갈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따라서, 중국 정부가 가정을 위수 북쪽인 현재의 진안현 농성진으로 비정하는 것은 완벽한 오류이고, 최진열 교수의 비정대로 천수군과 기산 사이의 어딘가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저는 위 지도를 기준으로 서현 북쪽 어딘가라고 추정합니다.
마속을 구원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장합보다 군사가 적었던 것도 아닙니다. 장합만 깨뜨리면 상규를 포위하고 성과를 거둘 수 있는데, 마속을 구원하지 않았고, 마속을 깨뜨리고 난 후에도 장합과 과감하게 격돌하는 대신 그대로 퇴각하는 선택을 했습니다.이 북벌의 실패로 이후의 제갈량의 북벌은 위나라에게 수가 뻔히 보이게 되었고, 거기다 제갈량의 극도의 보신주의적인 기동이 합쳐져 결국 북벌 때마다 '니가와'를 시전하고는 퇴각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제갈량이 직접 나아가 장합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고, 때문에 극도로 보신주의적인 기동을 행했다 이외에 합리적인 설명이 존재할까요. 제갈량은 장합이 기산으로 와서 싸움을 걸면 몰라도, 자신이 직접 진군해 싸우는 것은 극도로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니가와' 상태가 된 것이고, 장합도 곽회도 이에 걸려들질 않으니 결국 별수없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는 어처구니없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죠.
5. 마속에게 '책임 덮어씌우기'
상랑전에 따르면 마속은 패전 직후 도망가다 붙잡히는데, 이때 한중에 있던 승상장사 상랑이 이때 마속을 못본척 했다가 마속이 처형되면서 같이 면직되었다고 합니다. 또, 마속과 같이 부장들이 처형되었으며 수많은 군사가 마속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장면은 보통 제갈량이 마속의 죽음에 운 것과 대응되어 설명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지적하듯 마속의 처형은 너무나도 놀랍고 또한 신속하게 집행된 것이라 장완조차도 그래서 되겠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정도였다는 것을 볼때,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실상, 1차북벌 실패의 책임은 무엇보다도 제갈량에게 있습니다. 마속은 열류성을 지키는 것이 힘들다 판단해 제갈량의 군대가 올때까지 버틸 수 있도록 가정에 올라간 것 뿐인데 원군을 보내주지 않아 패배한 것에 불과하며, 상규를 직접 타격해 삼군을 평정한다는 지극히 간단힌 대전술을 어기고 충격적인 기동을 보여준 제갈량이야말로 가장 큰 패배의 책임자라고 할수 있습니다. 마속을 가장 큰 패배의 책임으로 몰아 처형한 이후 제갈량이 스스로 관직 강등을 청했다는 것은, 실상 마속의 처형으로도 숨길 수 없는 북벌 실패의 진정한 원인에 대해 진 자그마한 책임이 아니었을까요. 제갈량의 학교 동기이자 아마도 친우였을 상랑마저도 외면할 정도로, 그리고 부하 병사들의 반응에서도 보이듯 마속은 동정받았습니다. 반대로, 가정에서 군대를 수습해 멀쩡하게 퇴각하고 마속을 책임자로 몬 왕평은 승승장구하여 익주 출신으로서 갈 수 있는 최대의 관직까지 누리다 죽었습니다.
나무위키 마속 문서에는 이러한 전후사정, 즉 제갈량 기동의 문제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마속의 가정 등반에만 모든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또 여전히 많은 촉빠들은 제갈량의 보신주의적 기동에 대해 '촉이 국력이 더 약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리한 것'이라는 말같지도 않은 변명을 하며 수령님 결사옹위를 외치고 있습니다. 1차북벌이 가장 성공률이 높았던 북벌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면서도 보신주의적 기동을 옹호한다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가지를 모두 챙겨가면서 제갈량을 옹호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사고방식일까요.
6. 왜 마속이었는가
마속을 출전시키겠다고 결정했을때, 제장들은 위연과 오의를 대신 추천했습니다. 이 둘 모두 실전 경험이 많은 유비의 친위 전사 출신으로서 북벌에 종군한 이들이고, 긴 북벌 과정을 통해 제갈량의 친위 전사로 거듭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양양 출신이며 마량의 동생이라는 마속의 배경과 제갈량 본인의 양양 기반을 생각해보았을 때, 이 인선이 지극히 정치적인 의도로 행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친구인 승상장사 상랑을 한중에, 그 조카인 상총을 성도에서 근위대를 이끌며 치안을 책임지게 한 제갈량의 인선에서 드러나는 것은, 제갈량은 주요 요직을 형주계 중에서도 자신의 진정한 정치적 기반인 양양계에게 주었다는 것이고, 이 북벌을 통해 마속이 '어떻게든' 장합을 이기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면 전쟁영웅으로 거듭날 마속을 마량과 자신을 잇는 양양계와 형주계의 새로운 지도자로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갈량 작계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한 3세기 어느 이름없는 현자의 팩트폭력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제갈량이 처음 농우로 출병했을 때 남안, 천수, 안정의 세 군(郡) 사람들이 배반하여 제갈량에 호응했습니다. 만약 제갈량이 급히 진격했다면 이 세 군은 중국의 소유가 아니었을 것이나 제갈량은 천천히 행군하며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관병(官兵-위나라 군)이 농에 올라 3군을 회복하고, 제갈량은 척촌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이 기회를 잃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삼국지 <제갈량전> 주석 <원자(袁子)>
마속은 솔직히 좀 많이 억울한 감이 있는 케이스임
원래 작계대로면 본인이 모루가 되고(물론 원안은 열류성이었지만 숫적, 질적으로도 열세인 마속군이 지키기에는 힘든 지역이었으므로), 제갈량의 본군이 망치가 되어 산 기어오르던 장합군을 제갈량이 때려주는 것이었는데, 갑자기 마속군을 버리고 제갈량이 튀어버림
당연히 마속 입장에서는 개좆된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