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보는 쬬 군사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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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름눈사람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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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재 토벌전


황제가 기도위(騎都尉) 조조(曹操)에게 병사를 통솔케 하여 보냈는데, 황보숭과 조조는 주준과 군을 합하여 다시 전투를 벌여 적을 크게 격파, 수만 급의 목을 베었다. 조정은 황보숭을 도향후(都鄉侯)에 봉했다. 황보숭과 주준은 승기를 타고 진격하여 여남(汝南), 진국(陳國)의 황건당을 토벌했다. 파재를 양책(陽翟)에까지 추격, 팽탈(彭脫)을 서화현(西華;여남군)에서 공격하여, 이들을 모두 격파했다.〔四〕 남은 적들은 항복하거나 흩어져 도망했다. 세 개 군은 드디어 안정을 되찾았다. <후한서 황보숭전>


2. 변수 전투


장막이 장수 위자(衛茲)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어 태조를 뒤따르게 했다.


형양(滎陽-하남군 형양현)의 변수(汴水-황하의 지류)에 도착해 동탁의 장수 서영(徐榮)과 조우하여 싸웠으나 불리(不利)하여, 죽거나 다친 사졸들이 매우 많았다. 태조는 날아온 화살에 맞았고 타고 있던 말이 상처를 입었는데, 종제(從弟)인 조홍(曹洪)이 태조에게 말을 주어 밤중에 달아날 수 있었다. 서영은 태조가 이끄는 군사가 적은데도 온종일 역전(力戰-힘써 싸움)하는 것을 보고 산조(酸棗)는 쉽게 공략할 수 없다고 여겨 또한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위서 무제기>


3. 반란 평정


태조의 군사가 적었으므로 하후돈(夏侯惇) 등과 함께 양주(揚州)로 가서 모병하니 (양주)자사 진온(陳溫), 단양태수 주흔(周昕)이 군사 4천여 명을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용항(龍亢-예주 패국 용항현)에 당도하자 사졸들이 다수 모반했다. 질(銍-패국 질현), 건평(建平-패국 건평현)에 이르러 다시 군사 천여 명을 모으고 진군하여 하내에 주둔했다.<위서 무제기>


[위서] – 군사들이 모반하여 밤중에 태조의 장막을 불태우자 태조가 손수 검으로 수십 명을 죽였고 나머지가 모두 패하여 흩어지자 영(營)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모반하지 않은 자는 5백 여 명이었다.


4. 동군 전투


흑산적 우독(于毒), 백요(白繞), 수고(眭固;휴고) 등 10여 만 무리가 위군(魏郡-기주 위군), 동군(東郡-연주 동군)을 침략했다. 왕굉(王肱)이 이를 막지 못하자 태조가 군을 이끌고 동군(東郡)으로 들어가 복양(濮陽-동군 복양현)에서 백요를 격파했다. 이에 원소가 표를 올려 태조를 동군태수로 삼으니 동무양(東武陽-동군 동무양현)을 치소로 삼았다.<위서 무제기>


5. 동무양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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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황 전투


초평 3년(192년) 봄, 태조가 돈구(頓丘-동군 돈구현)에 주둔하자 우독 등이 동무양을 공격했다. 이에 태조가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산으로 들어가 우독 등의 본둔(本屯-본영)을 공격했다. [25]


[25] [위서] – 제장들은 모두 응당 (동무양으로) 돌아가 구원해야 한다고 하자 태조가 말했다,


“손빈(孫臏)은 조(趙)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魏)나라를 공격했고 경엄(耿弇)은 서안(西安-청주 제국 서안현)을 패주시키고자 하여 임치(臨菑-제국 임치현)를 공격했소. 적이 우리 군이 서쪽으로 간다는 말을 들으면 (본둔으로) 돌아올 것이니 무양의 어려움은 저절로 풀릴 것이오. 만약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우리 군이 능히 그들의 본둔을 깨뜨릴 수 있고, 적은 결코 무양을 함락시키지는 못할 것이오.”


그리고는 이를 실행했다.


우독 등이 이 일을 듣고 (동)무양을 버리고 되돌아왔다. 태조는 수고를 요격(要擊-도중에서 차단하여 공격함)하고 또한 흉노 어부라(於夫羅)를 내황(內黃-위군 내황현)에서 공격해 모두 대파했다. <위서 무제기>


7. 황건적과의 싸움


[위서] – 태조가 보기 천여 명을 이끌고 전지(戰地)를 시찰하다 갑자기 적의 둔영에 맞닥뜨려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죽은 자가 수백 명에 이르니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적이 뒤이어 전진했다.


8. 황건적 평정


황건은 도적이 된지 오래고 여러 차례 승세를 탔으므로 병사들이 모두 정예하고 사나웠다. 태조의 군사들은 구병(舊兵-오래된 군사)이 적고 신병(新兵)들은 제대로 훈련 받지 못했기에 전군이 모두 두려워했다. 태조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친히 장사(將士-장병)들을 순시하며 상벌을 분명히 권하니 군사들이 다시 기세를 떨쳤다. 그 기세를 이어 토격(討擊)하자 적들이 점차 꺾이어 물러났다. 이에 적이 태조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예전에 제남(濟南)에서 신단(神壇)을 허물어뜨렸을 때는 그 도(道)가 중황태을(中黃太乙)과 같아 그대가 도를 아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 다시 미혹(迷惑)되었구려. 한(漢)의 운수가 이미 다하고 황가(黃家)가 설 것이니, 하늘의 대운(大運)은 군(君-그대)의 재능과 역량으로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오.”


태조가 격서(檄書)를 읽고는 이를 꾸짖으며 욕했다. 여러 차례 항복할 길을 열어 보여 주고는 기병(奇兵)과 복병(伏兵)을 설치했다. 밤낮으로 어울려 싸워, 싸울 때마다 번번이 포로로 사로잡히자 이에 적들이 퇴주(退走)했다. <위서>


9. 평원 전투


원술이 원소와 서로 틈이 벌어지자 공손찬에게 도움을 청했다. 공손찬은 유비를 고당(高唐-청주 평원군 고당현)에, 선경(單經)을 평원(平原-평원군 평원현)에, 도겸을 발간(發幹-연주 동군 발간현)에 주둔하게 하여 원소를 핍박했다. 태조가 원소와 만나 이를 공격해 모두 격파했다.<위서 무제기>


10. 광정 전투


초평 4년(193년) 봄, 견성(鄄城- 연주 제음군 견성현)에 주둔했다. 형주목 유표(劉表)가 원술의 양도(糧道-군량 수송로)를 끊자 원술이 군을 이끌고 진류로 들어와 봉구(封丘-진류군 봉구현)에 주둔하고, 흑산적의 남은 무리와 어부라 등이 그를 도왔다. 원술은 장수 유상(劉詳)을 광정(匡亭)에 주둔하게 했다.

태조가 유상을 공격하자 원술이 그를 구원하니 더불어 싸워 대파했다. 
<위서 무제기>


11. 원술 추격전


원술은 봉구(封丘)로 물러나 지켰고 이에 봉구를 포위했는데 맞붙어 싸우기도 전에 원술은 양읍(襄邑-진류군 양읍현)으로 달아났다. 이를 추격하여 태수(太壽)에 당도하자 수로의 물을 터뜨려 성에 물을 끌어들였다. (원술은) 영릉(寧陵-예주 양국 영릉현)으로 달아났고 또다시 추격하자 구강(九江-양주 구강군)으로 달아났다.


12. 도겸 10성함락


가을, 태조가 도겸을 정벌해 10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도겸은 성을 지킬 뿐 감히 나오지 못했다.


13. 담성 공성전


도겸이 담성(郯城)으로 물러나 지키니, 조조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이에 되돌아갔다.<후한서 도겸전>


14. 도륙


지나는 길에 있던 추려(取慮), 저릉(雎陵), 하구(夏丘)를 함락시키고, 모조리 도륙(屠戮)하였다.<후한서 도겸전>


15. 재차 시작된 도겸 공격


여름, 순욱(荀彧), 정욱(程昱)에게 견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도겸을 정벌하여 다섯 성(城)을 함락시키니 공략한 땅이 동해(東海-서주 동해군)에까지 이르렀다.<위서 무제기>


16. 담현 전투


돌아오는 길에 담(郯-동해군 담현)을 지나는데 도겸의 장수 조표(曹豹)가 유비와 함께 담(郯) 동쪽에서 태조를 요격했다. 태조가 이를 격파하고 마침내 양분(襄賁-동해군 양분현)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지나는 길에 잔륙(殘戮-살륙)한 곳이 많았다.<위서 무제기>


17. 복양 전투


여포가 출병하여 싸웠는데 먼저 기병으로 청주병을 공격했다. 청주병이 달아나 태조의 진영이 어지러워지자 (태조는) 말을 달려 불길을 벗어나다 말에서 떨어져 왼쪽 손바닥에 화상을 입었다. 사마 누이(樓異)가 태조를 부축해 말에 오르게 하고 이끌고 빠져나왔다.<위서 무제기>


원위(袁暐)의 [헌제춘추]獻帝春秋 – 태조가 복양을 포위하자 복양의 대성(大姓)인 전씨(田氏)가 내통하여 태조는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동문을 불태워 돌아갈 뜻이 없음을 보였는데, 싸움이 벌어지자 군이 패했다. 여포의 기병이 태조를 붙잡았으나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물었다,


“조조는 어디에 있는가?”


태조가 말했다,


“황마(黃馬)를 타고 달아나는 자가 조조입니다.”


이에 여포의 기병이 태조를 놓아주고는 황마를 탄 자를 뒤쫓았다. 성문의 불길이 여전히 거세었으나 태조는 불길을 뚫고 빠져나왔다.


18. 복양 대치


둔영에 도착하기 전 제장들은 태조가 보이지 않자 모두 두려워했다. 이에 태조가 친히 군사들을 위로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속히 공구(攻具-공성 무기)를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다시 여포를 공격하여 백여 일 동안 서로 대치했다. 황충(蝗蟲-누리)이 일어 백성들이 크게 굶주리고 여포의 양식 또한 소진되니 각각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위서 무제기>


19. 정도 전투


흥평 2년(195년) 봄, 정도(定陶-제음군 정도현)를 습격했다. 제음태수 오자(吳資)가 남성(南城)을 지키니 함락시키지 못했다. <위서 무제기>


20. 여포 격파


때마침 여포가 도착하자 또한 여포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위서 무제기>


21. 거야 전투


여름, 여포의 장수 설란(薛蘭), 이봉(李封)이 거야(鉅野-연주 산양군 거야현)에 주둔했다. 태조가 이를 공격하자 여포가 설란을 구원했는데, 설란은 패하고 여포는 달아났고 마침내 설란 등을 참수했다. <위서 무제기>


22. 동민 전투


여포는 다시 동민(東緡-산양군 동민현)에서부터 진궁과 함께 만여 명을 이끌고 와서 싸웠다. 이때 태조의 군사들이 적었는데 복병을 설치하고 기병(奇兵-기습부대)을 풀어 공격하여 이를 대파하니 여포는 밤중에 달아났다. <위서 무제기>


[위서] – 이때 군사들이 모두 보리를 수확하러 나가 있어 남아 있는 자는 천명도 안 되었고 둔영은 견고하지 못했다. 이에 태조가 부인(婦人)들에게 영을 내려 비(陴-성가퀴. 성 위에 쌓은 낮은 담)를 수비하게 하고 남아 있는 전군으로 여포에 맞섰다. 둔영 서쪽에 큰 둑이 있었는데 그 남쪽 숲이 매우 깊었다. 여포는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서로 말하기를,


“조조는 속임수가 많으니 복병 가운데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고 하며 군을 이끌고 남쪽 10여 리 되는 곳에 주둔했다. 다음 날 여포가 다시 오자 태조는 둑 안에 병사들을 숨기고 나머지 절반의 군사는 둑 밖에 두었다. 여포가 점차 진격하자 영을 내려 경병(輕兵-경무장병)으로 싸움을 걸게 했다. 서로 맞부딪치자 복병들이 일제히 둑 위로 오르며 보기(步騎-보병과 기병)가 함께 진격하여 여포군을 대파하고 북과 수레를 노획했다. 여포군의 둔영에까지 추격했다가 돌아왔다.


23. 정도 함락


태조는 다시 정도(定陶)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군을 나누어 여러 현들을 평정했다. <위서 무제기>


24. 옹구 전투


장막은 여포를 뒤따르면서 동생인 장초(張超)에게 가속들을 이끌고 옹구(雍丘-진류군 옹구현)를 보전하도록 했다.

가을 8월, 옹구를 포위했다.

겨울 10월, 천자가 태조를 연주목(兗州牧)으로 임명했다.

12월, 옹구가 무너지고 장초는 자살하였고 장막의 삼족을 멸했다. 장막은 원술에게로 가서 구원을 청하려다 그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위서 무제기>


25. 진국 공략


연주가 평정되자 동쪽으로 진(陳-예주 진국)의 땅을 공략했다.

이 해 장안에 난이 일어나 천자가 동천(東遷)했다. 조양(曹陽)에서 (이각군에게) 패하자 황하를 건너 안읍(安邑)으로 행차했다.

건안 원년(196년) 봄 정월, 태조군이 무평(武平-예주 진국 무평현)에 임하자 원술이 임명한 진상(陳相-진국의 국상) 원사(袁嗣)가 항복했다. <위서 무제기>


26. 협천자 과정에서의 위기


위략魏略에서 「진眞은 본래 성姓이 진秦이었는데 조씨曹氏의 양자가 되었다. 혹은 ‘그의 부친인 백남伯南[2]이 일찍부터 태조太祖와 서로 친했는데 흥평興平(194-195년) 말에 원술袁術의 부당(部黨,도당,일당)이 태조와 서로 공겁(攻劫,공격)하니 태조가 출군하였다가 적군에게 뒤쫓겨 달아나 진씨秦氏(의 집)으로 들어가자 백남이 문을 열고 그를 맞아들였다. 적군이 태조의 소재를 묻자 답하기를 ’내가 그 사람이다‘ 하였다가 마침내 해를 입었다. 이로 말미암아 태조가 그의 공을 기려 그의 성을 (曹로) 바꾸었다.’고도 한다.」 하였다.


27. 여남 전투


여남과 영천의 황건적 하의(何儀), 유벽(劉辟), 황소(黃邵), 하만(何曼) 등은 각각 그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는데, 처음에 원술에 호응했다가 다시 손견에 붙었었다. 2월, 태조가 진군하여 이를 토파(討破)하고 유벽, 황소 등을 참수하자 하의의 무리가 모두 투항했다. 천자가 태조를 건덕장군(建德將軍)으로 임명했다. <위서 무제기>


28. 양봉 격파


조조가 낙양이 무너지고 황량하여(殘荒 = 破败荒凉) 마침내 황제를 옮겨 허許현으로 행차하였다. 양봉, 한섬은 거가를 막으려 하니(要遮=拦截) 이르지 못했고, 조조가 치니, [헌제춘후獻帝春秋 : 거가가 낙양에서 나와 轘轅(山名, 在河南 登封县 西北三十里)의 동쪽에서부터 양봉, 한섬이 군을 이끌고 추격하였다. 경기병이 이미 이르니, 조조가 양성산陽城山 골짜기 가운데의 요충지에 복병을 놓으니, 크게 패하였다. ] 양봉, 한섬은 원술에게 달아나 마침내 양주楊와 서주徐 사이에서 제멋대로 횡포하였다(縱暴=肆意暴虐).<후한서 동탁전>


천자가 동쪽으로 향하자 양봉은 양(梁)에서부터 이를 요격하려 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겨울 10월, 공(公)이 양봉을 정벌하니 양봉은 남쪽으로 원술에게로 달아났고 마침내 양봉의 양(梁)에 있던 둔영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위서 무제기>


29. 완성 전투


2년(197) 봄 정월, 공(公)이 완(宛-형주 남양군 완현)에 이르자 장수가 항복했는데 그 뒤 이를 후회하여 다시 모반했다. 공(公)이 더불어 싸웠으나 군이 패하고 날아온 화살에 맞았고, 장자(長子-큰 아들) 조앙(曹昂), 제자(弟子-동생의 아들. 즉 조카) 조안민(曹安民)이 해를 입었다.<위서 무제기>


30. 장수 추격군 격파


이에 공은 군을 이끌고 무음(舞陰-남양군 무음현)으로 돌아갔는데, 장수가 기병을 이끌고 와서 노략질하자 공이 이를 격파했다. 장수는 양(穰-남양군 양현)으로 달아나 유표와 합쳤다.

공(公)이 제장들에게 말했다,


“내가 장수 등을 항복시켰으나 실수로 인질을 잡아 두지 않아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소. 내가 패한 이유를 알만 하오. 제경(諸卿)들은 이를 잘 살펴 지금 이후로 다시 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그리고 허도로 돌아왔다.


31. 수춘 전투


가을 9월, 원술이 진(陳-예주 진국)을 침략하자 공이 동쪽으로 가서 정벌했다. 원술이 공이 친히 온다는 것을 듣고 군(軍)을 버리고 달아나며 그의 장수인 교유(橋蕤), 이풍(李豊), 양강(梁綱), 악취(樂就)를 남겼다. 공이 도착하여 교유 등을 격파하고 모두 참수했다. 원술이 달아나 회수를 건넜다. 공이 허도로 돌아왔다.


32. 호항 전투


겨울 11월, 공이 친히 남쪽으로 정벌하여 완에 도착했다. 유표의 장수 등제(鄧濟)가 호양(湖陽-남양군 호양현)을 점거하니 이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등제를 사로잡자 호양이 항복했다. <위서 무제기>


33. 무음 전투


무음(舞陰)을 공격해 함락시켰다.<위서 무제기>


34. 장수 포위


3월, 공이 양(穰-남양군 양현)에서 장수(張繡)를 포위했다.

여름 5월, 유표가 군사를 보내 장수를 구원하며 군(軍)의 배후를 끊고자 했다.


[헌제춘추] – 원소를 배반한 병졸이 공에게로 와서 말했다,


“전풍(田豐)이 원소에게 허도를 빨리 습격하라고 하면서 만약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호령하면 가히 사해(四海)를 지휘해 평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공이 장수(張繡)에 대한 포위를 풀었다.


35. 추격군 격파


공이 군을 이끌고 퇴각하려 하는데 장수의 군사들이 추격해 와 공의 군이 전진할 수 없자 둔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했다. 공이 순욱(荀彧)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적이 와서 우리 군을 추격해 와 비록 하루에 몇 리 밖에 행군하지 못하지만 내가 헤아려 보건대 안중(安衆-남양군 안중현)에 도착하면 반드시 장수(張繡)를 격파할 수 있소.”


안중(安衆)에 도착하자 장수가 유표의 군사와 합쳐 험지를 지키니 공의 군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공은 밤중에 험지를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輜重)을 모두 지나게 한 후 기병(奇兵)을 두었다. 날이 밝자 적은 공이 달아났다고 여겨 전군이 추격해왔다. 이에 기병(奇兵)을 풀고 보기(步騎)로 협공하여 적을 대파했다. <위서 무제기>


36. 추격군에 패배


가후가 장수에게 (군대를) 재촉해

"다시 추격하십시오. 다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라 하자 장수가 거부하며

"공의 말을 쓰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소. 지금 이미 패하였는데, 어찌 다시 추격하겠소?"라 했다. 가후가"군대의 형세에는 변화가 있기 마련이니, 빨리 추격해 가면 필히 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라 했다.


장수가 이 말을 믿고, 마침내 흩어진 군졸을 거두어 추격해 가서 크게 싸웠는데, 과연 이기고 돌아왔다. <위서 가후전>


37. 팽성 전투


9월, 공이 동쪽으로 여포를 정벌했다.

겨울 10월, 팽성(彭城-서주 팽성국)을 함락하고 팽성상(相) 후해(侯諧)를 사로잡았다.<위서 무제기>


38. 하비 국지전


진격하여 하비(下邳)에 이르니 여포가 친히 기병을 이끌고 역격(逆擊)했다. 이를 대파하고 여포의 효장(驍將-맹장)인 성렴(成廉)을 사로잡았다.<위서 무제기>


39. 하비 함락


이때 공이 연달아 싸워 사졸들이 피폐해졌으므로 돌아가려 하다가, 순유(荀攸)와 곽가(郭嘉)의 계책의 써서 사수(泗水)와 기수(沂水)의 물을 성에 끌어들였다. 한 달이 지나 여포의 장수 송헌(宋憲), 위속(魏續) 등이 진궁을 붙잡고 성을 들어 항복하니, 여포, 진궁을 사로잡아 모두 죽였다. <위서 무제기>


40. 사견 함락


마침내 공(公)이 황하를 건너 사견(射犬)을 포위했다. 설홍, 무상이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자 열후에 봉하고 오창(敖倉)으로 환군했다. 위충(魏种)을 하내태수로 삼아 하북(河北)의 일을 맡겼다.

당초 공이 위충(魏种)을 효렴으로 천거했었는데, 연주(兗州)가 모반하자 공이 말했다,


“오직 위충 만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위충이 달아났다는 말을 듣고 공이 노하여 말했다,

“위충이 남쪽으로 월(越)로 달아나지 않고 북쪽으로 호(胡)로 달아났을 것이니 너를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사견(射犬)을 함락시킨 후 위충을 사로잡자 공이 말했다,


“오로지 너의 재능을 아낄 뿐이다!“

이에 묶인 것을 풀어주고 그를 기용했다.<위서 무제기>


41. 소패 전투


공이 장차 친히 동쪽으로 유비를 치려 하자 제장들이 모두 말했다, “공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원소입니다. 지금 원소가 바야흐로 쳐들어오려 하는데 이를 내버려두고 동쪽으로 가시려 하니, 원소가 이를 틈타 우리 배후를 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공이 말했다, “무릇 유비는 인걸(人傑)이니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필시 후환이 될 것이오. 원소는 비록 뜻은 크지만 사세를 살피는 일에 더디니 필시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곽가 또한 공에게 권하자 마침내 동쪽으로 유비를 쳐서 깨뜨리고 유비의 장수 하후박(夏侯博)을 사로잡았다. <위서 무제기>


42. 하비 항복


유비는 원소에게로 달아났고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유비의 장수 관우는 하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다시 진격하여 공격하니 관우가 투항했다.


43. 백마 전투


2월, 원소는 곽도(郭圖), 순우경(淳于瓊), 안량(顔良)을 보내 백마(白馬)에서 동군태수 유연(劉延)을 공격하고, 원소 자신은 군을 이끌고 여양(黎陽)에 도착해 장차 황하를 건너려 했다.

여름 4월, 공이 북쪽으로 가서 유연을 구원했다. 순유(荀攸)가 공을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군사가 적어 대적할 수 없으므로 적의 세력이 분산되도록 해야 합니다. 공께서 연진(延津)에 도착해 장차 황하를 건너 원소군의 배후로 향하는 것처럼 하면 원소는 필시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할 것입니다. 그 연후에 경병(輕兵-경무장병)으로 백마(白馬)를 기습하여 엄기불비(掩其不備-적이 방비하지 못한 곳을 엄습함)하면 가히 안량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공이 이 말에 따랐다.

원소는 (공의) 군사들이 도하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즉시 군사를 나누어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하게 했다. 그러자 공은 군을 이끌고 급히 진군하여 백마로 나아갔다. 10여 리 떨어진 곳에 채 이르지 않았을 때 안량이 크게 놀라 (군을 이끌고) 와서 맞서 싸웠다. 장료(張遼), 관우(關羽)를 선봉에 세워 이를 격파하고 안량을 참수했다. 마침내 백마에 대한 포위를 풀고 그 백성들을 황하를 따라 서쪽으로 옮겼다. <위서 무제기>


44. 연진 전투


이에 원소는 황하를 건너 공의 군대를 추격하여 연진(延津) 남쪽에 이르렀다. 공은 군을 이끌고 남쪽 둑 아래에 주둔하고 군사를 시켜 망루에 올라 살펴보게 하니 ‘가히 5-6백기는 된다.’고 보고했다. 얼마 후 다시 ‘기병은 점점 많아지고 보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공이 말하길, “다시 보고하지 마라”고 하고는 기병들에게 영을 내려 말안장을 벗기고 말을 풀어놓게 했다. 이때 백마에서 치중(輜重)이 길을 떠났다. 제장들은 적의 기병이 많으니 돌아가 둔영을 보전하는 게 낫다고 하였다. 순유가 말했다,


“이는 적을 유인하려는 것인데 어찌 되돌아간다는 말이오!”

원소의 기장(騎將) 문추(文醜)는 유비와 함께 5-6천 기를 이끌고 앞뒤로 이르렀다. 제장들이 다시 말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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