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최대의 격전 뤼순대격전
작성자 정보
- 미나리법사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327 조회
- 목록
본문
러일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이자 일본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투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여순공방전을 뽑을수 있다.
여순항은 청일전쟁당시 일본이 점령한 적이 있다. 그때당시 일본은 별로 어렵지 않게 단 하루만에 여순항을 점령했고 일본군의
사망자도 불과 30명에 불과했지만 러일전쟁 당시 뤼순은 상황은 달랐다. 청일전쟁 이후 뤼순은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였고 뤼순항은 러시아의 소유였고 러시아는 1901년부터 대대적으로 콘트리크 방어 공사로 뤼순요새를 대대적으로 요새화하기 시작한다.
뤼순항 요새 방어를 구축했던 콘드라체콘 소장은 유능한 인물이였고 실제로 러일전쟁 발생이후 콘드라체콘 소장의 지휘아래 뤼순항은 몇달만에 미완성된 요새로 장기화된 포위전에서도 견딜수 있는 견고한 요새로 변모했다. 사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뤼순항 요새가 완전히 완성되는 시점은 1909년이였고 만약 일본이 몇년만 더 전쟁을 늦게 걸었다면 뤼순항은 러일전쟁때보다 훨씬더 견고한 요새가 되었을 것이며 일본군은 뤼순항을 점령할수 없었을 것이다.
러일전쟁 당시 요새화된 뤼순요새
사실 뤼순요새의 점령하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사실상 일본의 국운이 걸려있었다.
러일전쟁 당시 뤼순항은 러시아군의 주요 항구로서 당시 러시아의 함대들은 뤼순항을 본거지로 주둔중이였다.
거기다가 당시 러시아는 자신들이 최강의 전력인 발틱함대를 출동시켰고 만약 발틱함대가 뤼순항에 주둔중인 러시아 함대들과 연합한다면 일본은 그대로 해상의 장악권을 빼았길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면 보급문제로 인해서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할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가 자신들의 최대 전력인 발틱함대를 투입시킨 이상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도착하기전에 무조건 뤼순항구를 점령해서 지구 반바퀴를 돌아서 오는 발틱함대가 연료를 충전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크 항구로 오는 길목에 함대를 매복시켜 발틱함대를 전멸시키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블라디보스크 항구로 가는 길목은 총 3개가 있는데 하나가 일본과 한국 사이에 있는 쓰시마 해엽이고, 나머지 하나가 혼슈와 훗카이도 사이에 있는 쓰가루 해엽이고 나머지 하나가 훗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에 있는 소야해엽이였다.
이 3가지 길목 공통점이 일본 안마당에 위치에 있었고 길목이 매우 좁아서 함대를 매복시켜서 기습 공격을 하기가 매우 유리했기 때문에 일본이 세계최강의 함대인 발틱함대를 전멸시키기 위해서는 무조건 발틱함대가 자신들의 부족한 연료를 충원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크 항구로 가기위해서 이 3개의 해엽중 하나를 지나가는 길목에 함대를 매복시켜서 기습공격을 통해 발틱함대를 전멸 시키는 방법이 사실상 유일했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조건 러시아의 주요 항구인 뤼순항을 점령해서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뤼순항이 아닌 블라디보스크 항구로 가게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고 그게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였다.
러시아 발틱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3가지 루트. 보다싶이 전부다 입구가 좁아서 병력을 미리 매복시켜 좁은 입구를 통과하는 적군을 섬멸시키기 좋은 위치다.
노기가 이끄는 일본군은 뤼순요새의 동쪽 방면을 주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일본군에게 우선적으로 공격 대상이 된것은 대고산과 주고산에 위치한 러시아의 전방 진지였다. 동쪽 해안선에 가깝게 튀어나와 있는 이 두 전방 진지는 일본군의 포위망 구축을 방해하는 주요한 지형적 장애물이였으며 , 또한 이곳에 포병을 배치하면 뤼순시와 함대 , 그리고 동쪽 방면 방어선에 포격을 가할수 있어 우선적인 공략 대상이 되었다.
8월7일 일본군은 대고산과 소고산에 사전포격을 가하면서 보병들을 돌격시켰지만 7시부터 시작된 일본군 보병의 돌격은 얼마안되 러시아군의 반격에 저지당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8일에 다시 한번 위장공격을 가한후 재차 대고산과 소고산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이 공격은 뤼순항에 주둔중인 러시아 함대에 의해 겨우 막아냈으나 이후 집중적인 공격에 의해 8월 9일에 결국 대고산에 이어 소고산마저 일본군에게 점령된다.
이러한 대고산과 소고산 공격은 뤼순항을 총공격하기 위한 일본군의 사전준비작업 이였다. 그리고 일본군은 봉황산까지 전진하여 그곳에 사령부를 차리며 본격적인 뤼순공격 준비에 들어간다.
1차 총공세
8월 19일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어 이날 양군합쳐 500문의 화포가 서로 발포되는 격력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노기 사령관도 오후 1시에 236고지에 올라 전황을 시찰했다. 먼저 일본군의 제 1사단은 본격적인 대정자산에 있는 러시아군 진지에 공격을 개시했지만 러시아군의 맹렬한 반격을 받고 격퇴되었다. 20일에는 나카무라 사토루 여단장이 이끄는 보병 제2여단은 남방고지까지 순조롭게 진군했지만 여기서 러시아군의 저항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93고지를 야습으로 탈취했다. 또한 히라사 료조 소장이 이끄는 18여단은 19일과 20일에 용안 북방 보루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지만 이 방면은 공격측이 엄폐할수 있는 초목도 없었고 러시아군의 집중 사격을 받고 수많은 사상자와 미하라 시게오 연대장까지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퇴각했고 21일에는 이치노 소장이 이끄는 보병 제 6여단은 반룡산 남북의 러시아군 진지를 공격했지만 러시아군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고 보병 제 6연대의 참모장이 오우치 모리시즈 연대장까지 러시아군의 쓴 28발의 총탄을 집중적이고 맞고 전사하자 이날 공격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자 다음날인 오전 0시 새벽에 일제히 야습을 가하지만 러시아군은 탐조등이나 조명탕으로 주위를 비추어 일본군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고 보병 제 6여단은 오전 10시경 간신히 반룡산 동릉루 지역을 점령하고 오후 8시에 니시보리루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큰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전사한 오우치 연대장이 이끌었던 7연대의 잔여병력은 불과 장교포함 71명에 불과할 정도로 그야말로 전멸하였다. 어쨌든 이로인해 보병 제 6여단이 소속되어 있는 제 9사단은 반룡산 동서보루의 공략에 성공했고 이곳은 중반 요새의 제2 방위선에 몰려든 요지로 망대까지는 1km 였다.
그리고 보병 제 10여단은 러시아군의 제 2보루를 공격을 가했고 거기서 러시아군의 집중포화를 받고 간신히 점령에 성공하였지만 주변있던 불발탄 탄약들이 전투도중 생긴 화재로 인화에 폭팔했고 거기다가 러시아군의 집중사격을 받자 돌격대장이였던 요시나가 소령까지 중상을 당하고 남은 잔여병 역시 제2보루를 점령한지 3시간만에 제2보루를 버리고 퇴각한다.
노기 마레스케 대장은 반룡산보루를 기점으로 23일 망대에 공격을 명령했다. 이에 각 사단들은 24일 오전부터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각 사단들의 사상자는 결국 24일 노기 대장은 총공격을 중지시킨다. 이 1차 총공세로 일본군 전사자는 5000명 부상자는 1만명 이상이였고 러시아군의 전사자는 15000명 부상자는 4500명이였다.
2차 총공세
노기대장은 1차 총공세가 일본군의 막대한 피해만 입고 실패로 끝나자 점령한 판룡산 동서보루에서 요새 전면까지 참호를 파고 진격로를 확보해 보병의 진격시에는 충분히 지원포격을 실시하는 방식으로 공격방식을 바꾸기로 했으며 8월 30일에는 군사령부에 각 사단의 참모장과 참모등을 소집하여 정공법으로서 변경을 도입하는 회의를 했다. 그리고
9월1부터 러시아군에 근접하기 위해 참호건설을 개시했다.
9월 16일 일본군의 포병은 적견제의 포병을 개시하였고 오후 1시에는 용안북방, 수사영 양보루에 포격을 집중했다.
그리고 오후 5시에는 제 보병 제 1여단이 돌격을 개시하였다. 제 1여단은 순로좁게 진격해서 목표였던 남산의 북각을 점령하고 203고지를 공격했지만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고 큰 손해만 입는다. 20일에는 고전하는 2여단에게 제 9사단이 용안 북방의 러시아군 진지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어왔고 제1 도루에 포격을 개시하고 제 1여단도 오후 5시에 남산 파산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203고지 공격은 쉽지 않았고 산정의 일각을 잠시 점령하는데 성공해도 이후 러시아군의 대역습에 산정을 다시 빼았기는 일이 반복되었고 24일에는 힘들게 점령한 제 2선도 빼았겼을 뿐만 아니라 제 1여단의 여단장이 야마모토 노부유키 소장까지 러시아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전사하자 결국 결국 제 1사단은 203고지 공격을 포기한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전사자는 900명 이상에 부상자는 4000명에 육박하였고 러시아군의 전사자는 600명에 부상자는 2200명이였다.
3차 총공세
한편 노기는 각 사단, 여단장들에게 공격을 개시하면서도 280mm 유탄포로 10월 1일부터 뤼순항 항만부에 대한 포격을 개시하 뤼순항에 주둔중임 함선에도 명중탄을 주어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한다. 이에 노기 대장은 이러한 280mm 유탄포가 요새 공격에도 효과가 있다고 판단해 포를 늘려 최종적으로 18문이 투입된다.
10월 18일 노기 대장은 니류산 보루와 마츠키 산보루의 동시 공격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23일날 참모장 회의를 실시
하여 26일날 다시 총공격을 결정한다. 제 1사단이 마츠키 산보루, 9사단이 니류산 보루와 반룡산 보루 , 그리고 제 11사단이 동관산을 공격 목표로 설정하고 26일 이른 아침부터 공성포병으로 포격후 총공세를 가한다.
제 1사단의 보병 제 2연대가 마츠키 산으로 갱도 굴진을 개시하고 러시아측도 갱도를 파고 폭약을 걸어 일본측의
갱도를 파괴하는 식으로 저항했고 29일이되면 러시아군은 산병호를 탈취하지만 다시 제 1사딘이 역습을 걸어 산병호를 다시 탈환하는데 성공하낟. 그리고 30일날에는 포격이후 제 2연대가 마츠키 산보루로 돌격을 시작하지만 러시아군의 포위를 받고 철수한다. 그리고 제 9사단의 우익대인 19연대가 니류산보루의 사제산병병을 점령하여 갱동굴진을 개시하고 좌익대인 보병 7연대도 반룡산 복보루에 돌격하여 거기있는 러시아군 진지를 점령한다 . 그리고 제 9사단은 반룡산 동남의 독립보루에 대한 공격을 개시 보병 35연대가 돌입하여 러시아군의 진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지만 러시아군의 역습으로 다수의 다수의 병력을 잃고 퇴각하지만 제 9사단의 사단장인 오오시마 히사나리 중장이 예비 1개 중대를 스스로 이끌고 돌격해서 다시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제 11사단은 10월 30일부터 11사단의 보병 제 22연대가 히가시계관산 키타보루를 공격해 거기있는 러시아군 진지를 점령하지만 히가시계관산에 있는 러시아군의 제2 진지를 공격한 보병 제 44연대는 러시아군의 집중포화를 받고 전멸한다. 그리고 제 12연대역시 러시아군의 집중 사격을 받아 피해가 속출해 퇴각하였고 노기 대장은 각 사단이 갱도 작업이 완료되기까지 꽤 기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총 공격을 중단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전사자는 1000명 이상 부상자는 3000명에 달했고 러시아군도 600명이 전사 4500명에 달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4차 총공세
2차 총공세마저 실패하자 노기는 오로직 203고지에만 공격을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만주군 총사령관 오야먀 이와오 대장은 이런 노기의 결정에 반대하였고 하루빨리 러시아군의 발틱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여순항으부터 계속해서 우선적으로 공격해서 점령하라고 압박을 가했고 총참모장인 고마다 겐타로 대장까지 오야마 이와오 대장과 의견을 같이해 압박을 가하자 결국 노기는 다시 한번더 뤼순요새에 11월 26일부터 뤼순요새에 대한 제 3차 총공세를 하기로 결정한다. 26일 제3차 총공세를 위해 편성된 나카무라 사토루 소장이 이끄는 특별 예비대가 공격을 실시하였고 특별 예비대는 아군의 식별을 목적으로 병사들 전원이 백금을 착용하고 있어 백열대라고 불렀다. 백열대는 8시 50분경에 일제히 돌입을 시작하였고 4포대 서북각에 있는 철모장 절단작업중에 러시아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부대는 거의 전멸당하고 나카무라 사토루 소장역시 집중사격을 받고 부상을 입으면서 공격을 받으면서 결국 철군했고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사상자는 7000명에 달했다. 결국 노기는 다시 공격을 당초 계획했던 것인 203고지로 변경한다.
뤼순공방전에서 가장 많은 양측의 사망자가 발생했던 203고지
203고지 공격
11월 27일 오후 6시 280mm 유탄포로 203고지에 한차례 포격을 가한후 제 1사단의 우익대인 후비보병 제 1여단 , 중앙대인 보병 제 1여단이 돌격을 감행한다. 우익대는 203고지 서남부와 러시아군이 장악한 제2선 산병호의 좌익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중앙대는 노호랑구산으로 돌격을 개시하지만 밤이 되어 적의 역습을 받고 퇴각했다.
다음날 28일 제 1사단은 다시 공격을 개시하고 우익대는 후비보병 38연대의 증원을 받아 돌격을 개시해 제2선 산병호를 점령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상자가 속출한다. 그리고 후비보병 16연대의 증원을 받고 10시 30분경에는 203고지
정상에 돌격해 정상을 잠시 점령하지만 러시아군의 역습에 다시 산정상을 빼았긴다. 그리고 좌익대는 끈질긴 공격끝에 203고지 서부 산정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중앙대는 203고지 고지 동북부에 대한 공격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사이 러시아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보병 제 1연대장인 테라다 카네요시 연대장이 전사한다.
계속된 전투로 일본군의 피해가 생각보다 커지자 예비대인 7사단까지 뤼순으로 증원되었고 30일에는 203고지에
대한 포격을 개시한 이후 보병 제 28연대가 203고지 산정 동북부로 돌입하지만 러시아군의 공격에 퇴각하고 서남산 정상은 15,16연대가 돌격하지만 이역시 러시아군의 공격을 입고 퇴각한다.
오후 5시에는 다시 공격재개 명령이 내려져 6시 40분에는 제 1사단이 동북부 산정에 돌입해 일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지만 다음날이 12월 1일에 러시아군에 다시 빼았기고 이 전투에서 노기 마레스케 대장의 아들인 노기 키요노리 소위마저 전사한다.
이에 일본군은 시신을 수습하고 병력을 전비하기 위해 4일간 공격을 연기한다. 그리고 이날은 고다마 겐타로 총참모장이 도착해 노기에게 지휘권을 이양받는다.
그리고 12월 4일 다시 203고지에 대한 총공격이 내려지고 203고지의 서남보루 전역을 공격해 10시가 지나서 점령에 성공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5일에는 203고지 동북보루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고 22시쯤에 러시아군이 철수해 203고지를 완전히 점령한다. 이 공격으로 일본군의 전사자는 5000명 , 부상자는 12000명에 달했고 러시아군 역시 일본군과 비슷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203고지 함락이후 일본군은 203고지에 280mm 유탄포를 배치시켜 뤼순항에 있는 러시아군 함대를 연달에 포격을 가해 뤼순항에 있는 러시아 함대에 큰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12월 15일에는 일본군이 외곽에 남아있는 보루에 대한 지하에 파 놓은 참오에서 가죽밸트를 태워 유독가스를 발생시켜 러시아군 갱도로 스며들게 하는 방식으로 러시아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했고 그러자 뤼순요새를 구축했던 로만 콘드라체콘 소장이 해당보루로 직접 가서 정황을 확인하고 귀환하던 도중 일본군의 포격에 맞고 휘하 장교들과 함께 전사한다. 이에 러시아군 전체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게 된다. 이후 28일에는 일본군 9사단이 니류산보루를 공격해 러시아군 300명 이상이 전사한다.
그리고 해가 바뀌고 1905년 1월 1일에 뤼순항 동북면에 있는 망대까지 떨어지자 러시아군 사령관인 스텔셀리 중장은 일일본에 항복을 신청하였고 1월 5일 마침내 뤼순항이 항복으로 함락되면서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뤼순공방전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난다.
이 전투로 일본군의 전사자만 1만 54000명 이상에 병사자 역시 수천명 이상으로 총 2만명 이상에 달하는 사망자에 야마모토 노부유키 여단장을 포함한 장교급 전사자도 상당하였으며 부상자는 44000명 이상으로 총 6만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러시아군 역시 전사자 1만 6000명에 부상자까지 합치면 총 3만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 읽기 : 0 / 쓰기 : 0 / 댓글 : 10 / 공유 : 50 ]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