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뤼순전투에 목숨을 걸수밖에 없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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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이자 일본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투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여순공방전을 뽑을수 있다.
여순항은 청일전쟁당시 일본이 점령한 적이 있다. 그때당시 일본은 별로 어렵지 않게 단 하루만에 여순항을 점령했고 일본군의
사망자도 불과 30명에 불과했지만 러일전쟁 당시 뤼순은 상황은 달랐다. 청일전쟁 이후 뤼순은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였고 뤼순항은 러시아의 소유였고 러시아는 1901년부터 대대적으로 콘트리크 방어 공사로 뤼순요새를 대대적으로 요새화하기 시작한다.
뤼순항 요새 방어를 구축했던 콘드라체콘 소장은 유능한 인물이였고 실제로 러일전쟁 발생이후 콘드라체콘 소장의 지휘아래 뤼순항은
몇달만에 미완성된 요새로 장기화된 포위전에서도 견딜수 있는 견고한 요새로 변모했다. 사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뤼순항 요새가 완전히 완성되는 시점은 1909년이였고 만약 일본이 몇년만 더 전쟁을 늦게 걸었다면 뤼순항은 러일전쟁때보다 훨씬더 견고한 요새가 되었을 것이며 일본군은 뤼순항을 점령할수 없었을 것이다.
러일전쟁 당시 요새화된 뤼순요새
사실 뤼순요새의 점령하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사실상 일본의 국운이 걸려있었다.
러일전쟁 당시 뤼순항은 러시아군의 주요 항구로서 당시 러시아의 함대들은 뤼순항을 본거지로 주둔중이였다.
거기다가 당시 러시아는 자신들이 최강의 전력인 발틱함대를 출동시켰고 만약 발틱함대가 뤼순항에 주둔중인 러시아 함대들과
연합한다면 일본은 그대로 해상의 장악권을 빼았길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면 보급문제로 인해서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할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가 자신들의 최대 전력인 발틱함대를 투입시킨 이상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도착하기전에 무조건 뤼순항구를 점령해서 지구 반바퀴를 돌아서 오는 발틱함대가 연료를 충전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크
항구로 오는 길목에 함대를 매복시켜 발틱함대를 전멸시키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블라디보스크 항구로 가는 길목은 총 3개가 있는데 하나가 일본과 한국 사이에 있는 쓰시마 해엽이고, 나머지 하나가 혼슈와
훗카이도 사이에 있는 쓰가루 해엽이고 나머지 하나가 훗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에 있는 소야해엽이였다.
이 3가지 길목 공통점이 일본 안마당에 위치에 있었고 길목이 매우 좁아서 함대를 매복시켜서 기습 공격을 하기가 매우 유리했기
때문에 일본이 세계최강의 함대인 발틱함대를 전멸시키기 위해서는 무조건 발틱함대가 자신들의 부족한 연료를 충원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크 항구로 가기위해서 이 3개의 해엽중 하나를 지나가는 길목에 함대를 매복시켜서 기습공격을 통해 발틱함대를 전멸
시키는 방법이 사실상 유일했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조건 러시아의 주요 항구인 뤼순항을 점령해서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뤼순항이 아닌 블라디보스크 항구로 가게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고 그게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였다.
러시아 발틱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3가지 루트. 보다싶이 전부다 입구가 좁아서 병력을 미리 매복시켜 좁은 입구를
통과하는 적군을 섬멸시키기 좋은 위치다.
뤼순항 공방전은 8월달에서 1월달까지 총 5개월동안 진행되었고 4차레의 걸친 총공세끝에 일본군은 간신히 뤼순항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5개월동안의 공성전끝에 일본군의 전사자는 1만 5000명 이상에 부상자는 부상자는 44000명 이상 그리고 병사자도 수천명 이상으로 뤼순 공방전에서 최소 2만명 이상의 일본군이 죽었으며 러시아군 역시 16000명 이상이 전사했고 총 3만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흔히들 뤼순요새 공방전에서 노기 마레스케 중장이 답이 없는 반자이 돌격을 감행해서 수많은 병사들이 개죽음으로 만들었다고
비난을 받고 아직고 그런식의 평가들이 많다.
하지만 폭격기가 등장하기 이전에 기관총으로 무장한 적의 요새 참호를 점령하는 방법은 큰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돌격해서
점령하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거기다가 당시 일본은 무조건 발틱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뤼순항을 점령해야 했고 거기에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저 발틱함대가 도착할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는 입장이여서 사실상 시간은 러시아의 편이여서 요새를 포위해서 적군의 식량이 떨어질때까지 기다리는 포위전도 쓸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 당시에 누구라도 노기가 한 행동이외에는 다른 선택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노기 중장이 비난받아야 한다면
1차 세계대전까지 기술보족으로 포격이후 일제 돌격이라는 선택지밖에 쓸수 없었던 협상국, 동맹국 장성들 역시 전부다 비난받아
마땅하다.
거기다가 국내에는 노기 중장과 이치지 참모장이 미신을 신봉해 같은날, 같은 곳에서만 계속해서 그저 무모한 반자이 돌격만 반복해서 큰 피해를 입었고 이에 만주 사령부의 참모장 고다마 겐타로가 280mm 포를 끌고와서 단 4일만에 뤼순을 점령했다는 설이 마치 정설인것처럼 퍼져있다. 이설은 시바 료타로의 언덕위의 구름이란 책 때문에 일본내에서도 오랫동안 통설로 통했으나 이설은 원래 기밀일러전사라는 책에서 주장한 설로 일방적인 대본영의 증언만으로만 이루어져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있어 현재로서는 각종 반론을 받고 있다. 아마 대본영에서는 뤼순전투당시 입은 막대한 피해에 대해서 자신들 대신 그 책임을 전부다 뒤집어쓸
상대가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새로운 사료가 밝히는 격동의 진상(その時歴史が動いた 「二〇三高地の悲劇はなぜ起きたのか 新史料が明かす激戦の真相」)"을 통해 러시아 측의 자료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공개되었는데 10월 26일 시점에서 이미 러시아 뤼순 주둔함대는 280mm포의 타격으로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함포는 모두 요새포로 전용, 수병도 전부 육전대로 돌려졌다. 이 사실을 노기의 3군이 포로에게 확인했다고 한다. 원래 계획은 공성전을 치러나가며 뤼순을 점령하고, 방비가 엄중한 203고지를 우회하려 했다. 그러나 수뇌는 함대가 괴멸상태라는 정보를 믿지 않았다. 결국 연합함대, 대본영, 메이지 덴노 거기다가
육군 참모총장 야마가타 아리토모까지 합심해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무조건 뤼순요새를 점령하라고 노기의 3군에게 압박을 넣은 결과 노기는 큰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돌격을 할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노기 무능설에 대한 반론으로 쿠와하라 다케는 애초에 노기가 대본영에서 건네받은 여순의 지도에는 여순요새의 보루 배치등에 잘못이 있어 일본군 전체에서도 요새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할수 없었고 적의 진지의 규모가 불명한 이상 , 노기가 공략 지점을 자군에 유리한 동북 방면으로 한것은(철도나 도로가 있어 부대전개에 유리하다.)당연한 결단이라고 평가했고 베츠미야 단로는 노기중장은 1차 총공격에 피해가 컸던것을 받아 제 2차 총공격 이후에는 돌격호를 파고 나아가 아군의 손해를 억제하는 전술로 전환했다고 노기를 평가했다.
(뤼순 공방전당시 일본군 총사령관이였던 노기 마레스케 중장.)
그리고 4차레에 걸친 총돌격 중에서 정작 일본군의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던 돌격은 노기가 지휘했는 돌격이 아닌 정작 고다마가 지휘했는 4차 돌격이란 점역시 어느정도 생각해 볼만한 점이다.
그리고 노기 중장은 뤼순공성전은 실제로 본인의 아들까지 전선에 투입해서 전사할 정도로 본인역시 나름 솔선수범하였고 실제로
노기장군은 평생동안 죽은 병사들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일로 인해 메이지 덴노가 붕어하자마자 할복까지 했을 정도였다. 즉 노기장군 역시 러일전쟁에 본인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사활을 걸었는 것이다.
그런 노기 장구에게 부하들이 헛되게 개죽음하게 만들었는 비난은 너무 가혹한 비난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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