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보급선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경상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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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임진왜란 초창기, 부산 일대에 상륙한 일본군은 제대로 통솔되지 못하고 있던 경상좌도 방면 조선군을 무너트린 뒤 한양을 향해 급속도로 북상했음
당연히 그만큼 고속으로 기동하는 군대를 위해선 안정적인 보급망이 확보되어야 하는 법이고, 그래서 후속으로 상륙한 일본군은 경상도 전역을 유린하는 동시에 두 경로의 보급선을 확보함
하나는 경주-영천-상주로 이어지는 육로 보급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선에서 사용 중이던 낙동강 수운 인프라를 그대로 활용한 수로 보급선
하지만 개전 초기부터 이어진 경상좌도 조선군의 끊임없는 유격전과 진주성을 통해 습격해오는 경상우도 조선군은 이 보급선의 유지를 까다롭게 만들었고, 경상좌병사 박진이 흩어진 조선군 유격대들을 하나로 통합한 1592년 7월부터 경상도 방면 일본군은 상주, 영천, 경주 등 보급선에 필수적인 일부 거점 읍성들만 간신히 유지하는 처지가 됨
그리고 7월 중순, 명군의 참전 소식을 접한 조정은 그에 발맞춰 조선군에게도 공세 명령을 하달함
'하삼도의 군사는 떨쳐 일어나 적을 요격하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경상좌도 방면 조선군은 활동을 개시함
7월 23일 박진은 기동전력을 전부 창의정용군이라는 이름의 야전군으로 재편하였고, 7월 26일 의병장 권응수를 선봉으로 영천성으로 진격함
영천에 주둔한 1000여 명의 일본군은 성 밖으로 나서 조선군을 요격하려 했으나 조선군의 화력전에 밀려 성 안으로 퇴각한 뒤 아군이 올 때까지 농성에 돌입했고, 조선군은 매우 무모하게도 어떠한 공성 준비도 없이 무작정 정면 공세를 시작함
이때 돌격대의 선두에 선 권응수가 직접 도끼로 성문을 때려부수며 사기가 오를 대로 올라버린 조선군이 미친듯이 성 안으로 돌입해 무려 백병전으로 일본군을 압도해버리는 기염을 토했고, 일본군은 지휘관을 포함한 대다수가 시가전 도중 전사하고 반대편 성문으로 탈출하던 패잔병들도 대기하던 조선군 예비대에게 학살당함
영천이 조선군의 손에 넘어가자 일본군의 육로 보급선은 급속도로 불안정해졌고, 가까운 경주성까지 위협받기 시작했음
그래서 일본군은 1500명이 주둔한 경주의 방어선을 보강하기 위해 양산에 주둔한 이시카와 야스카츠의 기병대 500명을 급파했는데, 문제는 조선군이 병력을 더 모으는 동안 영천을 탈환한 병력 4000명을 경주 주변에 싹 깔아뒀다는 거
그래서 야스카츠의 기병대는 경주 노곡리를 지나던 중 의병장 김호가 지휘하던 1400명의 분견대에게 매복당했고, 수적 열세에 계곡 아래로 밀려나 고립당한 뒤 있는 거 없는 거 다 집어던진 조선군에게 궤멸당함
그렇게 경주성으로 접근하는 일본 증원군을 매복으로 털어먹던 조선군은 1592년 8월 중순 무렵 1만 명의 병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하고, 좌병사 박진이 직접 지휘한 이 병력은 경주성을 포위함
경주성에 주둔한 일본군은 뜬금없이 몰려든 만 단위 조선군을 보고 기겁했지만, 그럼에도 성 밖으로 나가 싸우는 걸 선택했음
일단 농성하거나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건 개죽음당하기 딱 좋았으니 싸우는 것 외에는 따로 선택지가 없었고, 더군다나 조선군이 경주성을 포위하며 주변 경계를 깜빡한 덕분에 온양에서 또다른 기병대 지원군 500명이 접근 중이었거든
그래서 조선군의 공성 시도로 시작된 1차전은 일본군의 승리로 돌아가게 됨
의병장 권응수가 공략을 시도하던 북문으로 일본군이 뛰쳐나와 기습을 가했고, 동시에 전장에 도착한 일본군 기병대 500명이 조선군 후방을 습격하며 북문 방향의 조선군이 와해, 600명의 전사자와 그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해 퇴각해야 했으니까
경주성의 일본군은 2000명 규모로 늘어났고 조선군은 혼란에 빠진 병사들이 와해되어 3000명 정도로 쪼그라든 상황
하지만 좌병사 박진은 퇴각하지 않고 경주성 인근 야산에 진지를 구축한 뒤 흩어진 조선군을 다시 재집결시키는데 성공하고, 일본군에게 호되게 당한 권응수는 그 사이 기병대로 불화살 짤짤이를 시전하며 경주성의 일본군이 나오지 못하게 견제를 해댐
그렇게 다시 모인 조선군은 한 달 가까운 시간을 경주성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한 채 일본군과 대치했고, 그 사이 조선군 진지에서는 경주판관 박의장과 군기시 화포장 이장손이 매우 중요한 화학탐구실험을 하고 있었음
매우 중요한 화학 실험을
1592년 10월쯤 되면 경주성의 일본군은 조선군이 가져온 화차와 각종 총통, 그리고 심심하면 날아들어오는 비격진천뢰에 한 달 내내 고통받아 더이상 못 버티게 되고, 결국 보급로고 뭐고 간에 성을 포기하고 반토막난 병력만으로 부산으로 도주하게 됨
경주가 함락되자 상주성에서 버티던 일본군도 고립된 채 성 안에서 버티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북쪽으로 도망갔고, 그렇게 일본군의 육로 보급선은 개전 6개월차에 완전히 소멸하게 됐지
그래도 아직 낙동강을 따라가는 수로가 있는 거 아니냐고?
아직 남아있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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