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초 경상도에서의 사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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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2개월이 지난 1592년 6월
경주와 안동, 대구 일대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경상좌도의 조선군과 진주판관 김시민을 선봉으로 밀고 들어오는 경상우도의 조선군에 의해 경상도 보급라인이 작살날 위기에 처한 일본군은 결국 북쪽으로 간 전방부대들을 제외하고는 경상도의 조선군을 먼저 박살내는데 집중하기로 했음
일본군이 가장 먼저 공세를 집중한 곳은 경상도 북부 안동 일대의 조선군 장악 지역
6월 5일 용궁현을 향해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어 지역 현령들이 어떻게든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북쪽에서도 강원도 방면 일본군이 남하하기 시작해 조선군이 양면으로 짓눌리기 시작했음
그 결과 6월 22일 조선군의 핵심 거점이던 안동과 예안현이 함락되며 불바다가 되었고, 조선군도 이에 격렬하게 반격해 예안현감 신지제와 용궁현감 우복룡이 일시적으로 안동을 탈환하는 등 6월 내내 일진일퇴의 공방이 펼쳐졌음
그리고 이 무렵, 자기 임지 주변에서 유격전을 펼치던 밀양부사 박진을 경상좌병사로 임명하는 선조의 교지가 도착함
경상좌병사로 임명되어 경상좌도의 모든 군권을 통솔하게 된 박진,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바로 30명 가량의 군관들만 이끌고 북상해 격전지 안동으로 향한 것이었음
사방의 조선군에게 안동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서를 보내며 긴급하게 북상한 박진은 피아 구분도 안 될 정도로 혼란스러운 난장판을 뚫고 들어갔고, 안동이 함락된 6월 22일에는 안동 일대 곳곳에서 싸우던 관군과 의병을 규합해 경상좌병영을 재편성해냄
곧바로 소식을 들은 의병장 권응수가 가까운 지역의 의병들을 전부 규합한 병력을 이끌고 경상좌병영에 합류했고, 이 소식은 곳곳에서 일본군의 대공세에 맞서던 조선군에게도 흘러들어감
하지만 이 등신 때문에 또 문제가 생기고 말았음
전임 경상좌병사라는 놈이 도망갈 때 알뜰살뜰하게 좌병영 창고를 털어가면서 좌병사 직인까지 들고 튀는 바람에 박진이 명령서를 발부해도 소식을 못 들은 조선군 지휘관들 입장에서는 밀양부사 하던 놈이 갑자기 미쳤는지 경상좌병사를 사칭하면서 직인도 없는 명령서를 발부하는 꼴이었거든
경상좌병사가 경상좌도 조선군 통솔을 못하는 이 환장할 사태는 안동의 좌병영에 합류한 영해부사 한효순이 자신의 명망으로 다른 조선군 현감들을 설득하면서 어찌저찌 해소됨
그렇게 지휘권 문제를 그럭저럭 해결한 박진은 곧바로 일본군을 상대로 반격 작전을 주도하기 시작함
7월 5일, 의병장 권응수가 합류하자마자 다시 영천 방면으로 파견되었고 남하하며 신녕 일대의 의병들을 흡수한 권응수는 해당 방면에서 북상해 안동의 조선군 배후를 노리려던 일본군을 상대로 매복해 박살내버림
그렇게 배후가 안정되자마자 박진은 좌병영군 전체를 이끌고 북상을 시작해 청송과 진보 등지에서 농성 중이던 조선군과 병기창의 화포들을 하나하나 규합했고, 그렇게 모인 조선군은 야전 한타로 일본군을 박살내고 안동을 탈환하기에 이름
안동 탈환 직후 조선군은 추가로 북상해서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넘어오는 통로들을 하나씩 틀어막았고, 강원도에서 남하한 아군이 조선군의 북쪽을 압박할 길이 막히게 된 경상도의 일본군은 그 때부터 거의 일방적으로 조선군에게 얻어터지기 시작함
경주와 영천, 상주의 읍성들을 점거하고 있던 일본군이 남쪽으로는 경주판관 박의장의 유격대에게, 동쪽과 북쪽으로는 안동의 경상좌병영 본대에게, 서쪽으로는 경상우도에서 넘어오는 경상우병영 증원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거
이 시기 경상도 일본군이 얼마나 심하게 처맞고 찌그러졌는지 7월 중순 영해부사 한효순이 경상좌도순찰사로 진급했을 때,
별다른 호위 없이 화려한 의장대와 함께 경북 일대를 순회하던 중 일본군 거점 근처에서 백성들이 뛰쳐나와 대열을 둘러싼 채 환호하며 잔치를 벌이는데도 바로 옆 성 위에서 내려다보던 일본군이 아무것도 못할 지경
이었음
이렇게 일본군을 궁지로 몰아넣은 상황에서 명군의 참전 소식이 들리자 더욱 사기가 오른 경상좌도의 조선군은 선조의 명령과 함께 본격적으로 일본군 거점들을 공략하기 시작함
7월 23일 경상좌도 조선군은 박진의 명령으로 창의정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재편해 4천 명의 야전군을 구성하게 되었고, 곧장 남하한 이들은 7월 26일 첫 공략 목표인 영천성에 도착함
영천성의 일본군은 성 밖으로 나와 야전을 시도했으나 조선군의 화력전에 밀려 성 안으로 퇴각했고, 성을 포위한 조선군은 7월 28일 성문을 돌파하고 정면 공세를 가해 백병전으로 일본군을 작살내 수급 500여 개를 취하는 대승을 거둠
이후 경주성 전투가 벌어지는 8월 무렵이면 경상좌도 조선군은 1만 명에 이르는 전력을 확보하고, 끝없는 조선군 웨이브에 경상도 보급선을 완전히 상실한 일본군은 궁여책으로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공격함과 동시에 해로를 통한 보급을 시도하지만...
어 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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