념글 임진왜란 만화 보충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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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 첨절제사 정발이 절영도에서 사냥을 겸한 훈련을 수행한 이유는 이미 사전에 침공 징후를 일부 포착했기 때문임
1592년 3월에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정명가도의 내용이 담긴 투서를 보내왔고,
왜관의 일본인 거류지에서는 급작스럽게 일본으로 귀국하는 인구가 급증하였음
투서는 몰라도 외국인 거류지에서 소개 작업이 시작되는 것은 명백한 전쟁 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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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해상 요격은 시도되지 않았음
일본군 선봉대가 경계하고 있지 않던 절영도의 조선군에게 먼저 접근해서 조총사격을 가해왔고, 훈련 중 기습당해 전투를 위해 승선하기에는 마땅치 않았기에 정발은 요격시도 없이 판옥선 3척을 자침처리하고 곧바로 부산진으로 퇴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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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에 배속된 조선군의 규모는 500명이 아닌 800명이었음
거기에다 부산진으로 대피한 피난민들 중 2200여 명이 수비대에 합류하며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에 맞선 병력은 약 3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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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진에서 명나라 공격을 위해 통과시켜달라는 협상을 시도한 적 없음
일본군은 안정적인 상륙 거점 확보를 위해 부산진을 협상 없이 공격했고, 정명가도 뭐시기 하는 협상 시도는 상륙 거점이 확보된 후인 동래성 전투 때나 했음
부산진과 마찬가지로 다대포진도 협상 없이 공격당해 수비대가 전멸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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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량을 태우고 도주했다는 경상좌수사 박홍은 부산진 전투에 참전한 적 없음
박홍은 애초에 일본군 폭탄드랍으로 부산진과 다대포진이 털리면서 좌수영 관할 진포들과 연락이 끊기는 바람에 좌수영을 소개하고 각 진포에 동래성 근교의 소산역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전달하느라 전투에 참여할 여건이 안 되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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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 전투 후 일본군은 정발에게 경의를 표하긴 했으나, 전투의 혼란으로 인해 시체들이 죄다 뒤섞여서 정발의 시신을 찾아내 수습하지는 못함
그래서 어찌어찌 되는 대로 부산진 관아에서 발견한 정발의 소지품과 갑옷, 투구를 가져다가 의관장(시신 대신 고인의 의복을 관에 넣고 치르는 장례)를 치뤄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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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 전투와 정발의 전사는 전쟁이 거의 끝나기 전은 개뿔 개전 1년차인 1592년 8월에서 11월 사이 이미 조선 조정에서 확인을 끝냄
부산진에서 간신히 탈출한 일부 피난민들에게 소식을 들은 정발의 부인 임씨가 조정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이에 따라 조사가 이루어진 결과로, 정발은 부산진 전투에서 끝까지 저항한 공로를 인정받아 1592년 12월 좌찬성으로 추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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