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istorum.com/t/han-dynasty-crossbow-iii.179336/
1. 서양식 크로스보우(쇠뇌)와 중국식 강노의 작동방식 차이점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파워스트로크'의 정의부터 설명하겠음.
파워스트로크란, 정지된 현을 방아쇠로 당기는 길이를 말하고, 이게 길수록 더 오랫동안 화살을 가속 시킬 수 있으며 위력도 증대됨
기본적으로 쇠뇌는 구조의 한계로 파워스트로크가 활보다 짧을 수 밖에 없고, 이러면 활과 쇠뇌가 동일한 장력일 때 쇠뇌의 위력이 후달리는 문제가 발생함.
<서양(위)와 중국(아래)의 방아쇠 작동방식을 묘사한 그림>
이런 문제를 서양은 현의 장력 자체를 뻥튀기하는 식으로 해결함.
이게 중세 서양 쇠뇌들은 활대 재질이 강철이고, 장력은 1200파운드는 기본에 1500파운드까지도 심심찮게 찍었던 이유임.
실제 위력은 1200파운드 강철쇠뇌가 150파운드 장궁과 비슷함
반면 중국의 쇠뇌는, 무려 전국시대부터 방아쇠에 복합레버를 사용해서 파워스트로크를 늘리는 쪽으로 변화함.
파워스트로크가 기존 쇠뇌의 3~4배가 되니까 장력이 6석(285파운드)인 쇠뇌로도 150파운드 장궁의 위력을 낼 수 있게 됨.
그리고 활대도 합성소재를 사용했음
쇠뇌이면서 합성궁의 장점도 흡수한 것
이 덕분에 중국에선 고대부터 강노를 대량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됨
+1석=약 47.5파운드
그냥 팔 두 짝 다리 두 짝만 있으면 쓸 수 있는 무기인데 위력도 강력하다? 이거 완전......
맞음, 그 당시 중국에서 쇠뇌의 위상은 르네상스 시기 머스킷과도 비슷한 면이 적잖게 있음
그 여파도 비슷한 게, 춘추시대부터 강력한 방어력과 충격력을 믿고 날뛰던 중국 중전차들은 강노의 등장으로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함
기사들이 총기가 발전하면서 약화된 것처럼, 강노가 보다 강력해질수록 전차의 필요성 또한 서서히 퇴색되고 이는 차차 기병으로 대체됨
결국 전국시대 후기의 전투 양상은 보병과 강노병, 기병이 각각의 한 축을 이루는 식으로 변화하게 되었음
2. 서양식 크로스보우와 중국식 강노의 장전방식 차이점
적은 장력의 쇠뇌로도 큰 위력을 낼 수 있다니 좋은 건 알겠는데, 어느 부분에서 이점이 있는 지는 감이 안 잡힐 수도 있음.
가장 큰 차이점은 장전 방식에서 확연하게 드러남.
먼저 서양 쇠뇌의 장전 방식은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장력이 약한 쇠뇌는 그냥 손으로 잡고 당겨서 장전함
다른 기구를 사용하면 쇠뇌에 끼우고 작동시키고 탈거하는 과정이 번거로운 데다 시간도 많이 잡아먹음
그래서 한 발로 지탱하고 양 손으로 당기는 방식이 가장 장전하기 쉽고 빠르고, 팔힘으로 부족하면 양손으로 붙들고 두 발로 눌러서 다리힘으로 장전할 수도 있음.
문제는 이런 장전법이 먹히는 쇠뇌는 장력이 세봐야 300파운드대라서 갑주를 착용한 병력을 상대로는 위력이 너무 약한 문제가 발생함
그 다음으로 편한 장전법은 '염소발'이라는 기구를 쓰는 것
염소발은 지레의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강한 장력의 쇠뇌도 손쉽게 장전할 수 있게 도와줌
설치하고 당기고 탈거하고 하는 과정이 조금 번거롭고 장전속도는 더 떨어지지만, 이게 없으면 인력으로 장전을 아예 못하거나 장전하는데 힘 다 빼는 참사가 벌어질 수 있었으므로 사용빈도가 높았음
사실 장전시간도 손으로 하는 것보다 고작 2초 느렸다고 함
마지막으로 윈들러스
삽화 보면 알아챌 수 있듯이 도르레의 원리를 사용한 것인데, 장전시간은 염소발 등 기존 방식의 2~3배가 되었지만 힘은 상당히 절약 가능함
이거 리뷰하던 유튜버는 7살 먹은 자기 딸도 윈들러스만 있다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1250파운드 쇠뇌를 장전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기도 할 정도로로
서양은 이렇듯 활의 장력 자체가 늘어나다보니 장전하는데 온갖 기구를 사용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는데, 반면 전한의 강노는
<6석미만 쇠뇌(빨강)과 8석이상 대황쇠뇌(노랑)의 장전모습을 묘사한 벽화>
이렇게 그냥 손으로 당기거나 발로 미는 방식으로도 충분했음
물론 벽화처럼 서서 장전하는 건 6석 미만 일반 노들이나 가능했고. 6석 이상 강노는 앉은 상태에서 두발로 밀어서 장전해야 됐음
8석 이상 강노는 대황쇠뇌라고 따로 지칭했는데, 아예 순수 인력으로는 장전 할 수 없어서 윈들러스로 장전했음.
대황쇠뇌는 보병들이 단독 운용하지 않고 구스타프 아돌프의 2파운더 야포나, 로마군의 스콜피온처럼 지원화기로 사용됨
한-흉노 전쟁 당시의 지휘관 중 한 명인 이광이 10배에 달하는 흉노기병대에 포위당했을 때, 수레과 장창으로 적을 차단하고 대황쇠뇌로 적장을 집중적으로 저격해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언급이 있음.
40석짜리 대황쇠뇌도 사용한 기록은 남아 있는데..... 이건 순수 공성용으로 야전에선 거의 안 쓰였을 것이고, 일종의 정밀한 투석기처럼 활용됨
<전한 시기 화살촉 유물 사진, 오른쪽부터 두 개가 쇠뇌용>
그리고 전한 시대에는 이미 대부분의 무기가 청동에서 철제로 대체되었지만, 화살촉의 재료는 여전히 청동이었음
청동은 철보다 다루기 쉬웠고, 화살촉의 공기역학적인 구조를 만들기 쉬웠기 때문임.
다만 그 특성상 청동은 철보다 비싸고 귀했으므로,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 화살촉만 청동제였으며 나머지 화살대와 연결부분은 철로 만들어 생산단가를 줄였음
3. 중국식 강노의 문제점과 운용방식
강노의 작동 방식은 기존 쇠뇌의 가장 큰 문제점인 구조의 비효율성을 해결한 획기적인 개선이었지만 역시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고, 구조가 복잡해져 생산비용이 증가하고 활대 길이가 최대 1.44m까지 늘어나는 문제가 발생함
활대를 합성궁처럼 만들다보니 합성궁의 단점인, 비가 오거나 습한 기후에 매우 취약한 특성을 보이기도 했음
반면 그냥 통짜 강철로 만들어버린 서양 강철쇠뇌들은 기후에 상대적으로 덜 영향을 받았음
그리고 활대 길이 말인데, 차라리 쇠뇌의 개머리판이나 몸체쪽이 길어지면 초기의 머스킷처럼 앞에다 거치대 깔고 쏘면 되는데 활대가 길어지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짐.
우선, 사격 시에 쇠뇌수가 더 많은 좌우 공간을 확보해야 함.
이러면 단위면적당 화력이 급감하는데다 전투대형이 느슨해지니까 백병전과 적의 돌격에 더 취약해짐
그렇다고 전방에 보병을 더 깔자니 사격각이 방해되는데다 아군 오사의 위험성도 올라가니 쉬운 선택은 아니고
게다가 강노는 장전을 손으로 할 수 있다 뿐이지 장력이 장난 아닌 건 똑같아서 장전시간도 일반 쇠뇌보다 길기 때문에 연사력 자체는 서양식 크로스보우보다 조금 더 빠른 수준임
결국 둘 다 일반 활보다 연사력이 심각하게 딸리는 건 매한가지이고
이런 약점들은 강노를 운용하는 방법이 전한 시대에 흉노와 치고박으며 크게 발달하며 조금 희미해졌음.
<전한 강노부대의 훈련 상상도>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흉노의 기마궁수대는 험지와 구릉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화살을 날리면서 한군을 유린했던 반면, 한군은 험지에서 강노도, 자랑하던 중기병도 제대로 쓸 수 없어 상당히 취약했음
그래서 유목민은 기병의 기동성이 약화되는 험지에서 약하다는 통념과 달리 험지는 흉노의 놀이터였음
반대로, 한군의 홈그라운드는 탁 트인 평야지대였음.
넓은 공간에서 강노수들은 편하게 장전하고 화살을 날려댔고, 전한 시기의기록에 따르면 평균 225m부터 그 짓을 해댔으니, 유효타를 가하려면 50m 안으로 접근해야 했던 흉노의 궁기병들은 화살 한 발 쏴보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사살당하기 일쑤였음
흉노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가죽갑옷과 나무방패는 강노를 막기엔 당연히 역부족이었으니 흉노군은 한군과 정면에서 붙으면 승패와 관련없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반대로 한군은 갑주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흉노를 보다 일방적으로 요리하는 것도 가능했음.
강노의 느린 장전 속도는 많은 강노수들이 2~3열을 이뤄 교대하는 방식으로 대처했고, 사마천의 말을 빌리자면 "강노수는 사격하기 위해 전진하고, 장전하기 위해 퇴각했"음.
장전이 완료된 사수는 맨 앞 열로 나와 사격했고, 그 직후엔 맨 뒷 열로 퇴각해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장전했음.
장전이 끝나면 잠시 휴식하면서 체력을 보전하기도 했고
그리고 평야에선 한군의 전차와 중기병(마갑까지 씌운 기병은 아님. 마갑기병은 위진남북조 시대 초기에 등장함)대도 날뛰기 좋은 지형이었기에 흉노군이 섣불리 접근했다간 개박살나기도 쉬웠음
게다가 한군은 보병들인 살수에게도 철로 제작된 찰갑을 보급할 여력이 있었기 때문에 고대의 폴암인 극과 장창으로 무장한 살수들은 경기병이 대다수인 흉노 기병들에게 상당히 위협적이었고
즉, 흉노군에게 평지전투, 한나라 군대와의 회전은 악몽이나 다름 없었음
오죽하면 자치통감에는 이런 대목도 실려 있음
진탕 왈, 호병 5인이 한병 1인을 감당하니, 어째서일까요, 병사의 칼날은 투박하며 무디고, 궁노는 이로운 것이 없어서입니다. 지금 듣기로 자못 한인의 재주를 얻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도 오히려 3인이 1인을 감당할 것입니다.
湯曰:「夫胡兵五而當漢兵一,何者?兵刃樸鈍,弓弩不利。今聞頗得漢巧,然猶三而當一。ㅡ자치통감
<한-흉노 전쟁기 한나라 병사들의 무장>
<위 그림에서 파이크병 앞에 녹각이 놓여있으면 삼국시대 표준 전투대형과 비슷했다고 볼 수 있음>
강노병과 살수 자체의 운용법은 전한 시대에 완성되었지만, 강노병을 보다 안정적으로 보호하며 전투하는 방법이 완성된 것은 후한 말, 삼국 시대 즈음임
당시 병력 배치의 기본은 강노병 앞에 녹각, 살수로 이중 격벽을 치는 것이었음.
녹각과 강노병 사이에 창과 극을 든 살수들이 포복자세(서 있으면 사격에 방해됨)로, 혹은 참호를 구축하고 대기하다가 적들이 녹각에 도달해 치우거나 넘어오려고 할 때 장병기로 후려치면서 저지하는 식임.
살수들은 강노병과 다르게 무기 다룰 공간만 있으면 되니 빽빽하게 채워넣어서 강노병에게 적이 닿을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했고
전선이 막북과 토번으로 확장되어 각 병과들의 기동성, 유연성이 극대화될 필요가 있는 당나라 시기에는 아예 쇠뇌수들도 창이나 도검류로 무장하고 다녔음
얘네는 적이 멀리 있을 때는 신나게 화살을 날리다가, 적이 가까이 다가오면 거추장스런 쇠뇌는 집어던진 후 칼뽑고 아군 살수들 뒤에서 예비대의 역할을 하며 근접병과로서 전투에 참여했음
리스크가 좀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당나라 시기에는 전선이 넓어지다보니 기동성을 극대화시킬 필요가 대두된지라 남북조시대와는 달리 기병들도 갑주 착용을 최소화하고, 때로는 중기병조차 마갑과 흉갑을 탈거한 후 돌격할 때도 있을 정도로 경기병화가 진행되었기에 노병들에게도 자기방어능력과 유연성을 보장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임
<명군 조총병의 전투 묘사도>
화약무기가 주력이 된 명나라에서도 쇠뇌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쇠뇌의 크기를 줄여버리는 바람에 파워스트로크는 평범한 쇠뇌 수준으로 줄어들며 위력도 급감했음
사실상 '강노'의 명줄은 송에서 끊긴 셈임
운용방식도 전한 대의 주로 강노병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과 기병을 노렸지만, 명 대에는 강노의 역할은 조총이 맡게 되었음
쇠뇌는 대부분 갑옷을 입지 않은 적병을 공격하였고 중무장 병사를 공격할 때는 갑옷의 틈을 노리거나 독화살을 사용하도록 교육 받았음
이 때 쇠뇌는 손쉽게 다룰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쓰인 거지, 위력 때문에 쓰인 건 아님
위력은 총포류가 압도적이니까.
그래서 거추장스럽지 않게 크기를 줄여버린거고 그게 틀린 판단도 아니었음.
마지막으로, 위 그림을 보면 강노병들이 교대사격을 했던 것처럼 조총병들도 장전할 땐 뒤로, 사격할 땐 앞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였는데, 강노병의 역할을 조총병이 완벽하게 물려받은 것으로 볼 수 있음
이렇게 원말명초 시대 이후 화약무기가 대량으로 운용되기 시작하면서, 전국시대부터 이어져온 강노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