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명군에 대한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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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빛늑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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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성들을 수탈했다?



거짓. 


애초에 파병 자체가 전제군주제이자 권력의 정점이었던 만력제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기에


명나라는 당연히 일단 신속히 파병부터 하고 필요한 군량은 현지에서 구매한 다음 본국에서 수송해오자는 마인드로 급파되었음


문제는 명나라 중기부터 꾸준히 일조편법(은(silver)을 통한 세금 납부 제도)이 시행되며 금속화폐 제도가 정착한 명과 달리


쌀과 면포를 화폐로 사용했던 조선에서는 은을 주로 고액화폐의 일종으로 잘라서 사용했음


그러니 명군이 건넨 은화에 상응할 만큼 군량을 내어주기가 어려웠고, 갑작스런 전쟁으로 식량의 총량 자체도 부족한 상태였음




지금으로 치면 한국에 전쟁 나서 미군이 급파됐는데 만 달러를 내미는 미군에게 내어줄 쌀이 한 바가지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음


그러니 당장 병사들을 굶길 수는 없는데 은화도 받아주질 않으니 일단 뺏어서라도 먹일 수밖에 없었던 것임


오히려 만력제는 정유재란이 터졌을 때 파병군을 20만으로 늘리고 산동의 쌀을 대규모로 운송해 조선 백성들을 먹이기까지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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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린이 충무공에게 무례하게 대했다?



일부 사실.


진린은 광둥 진씨의 시조가 되는 사람이며 명나라에 있을 적에는 첨서광동도사, 낭산 부총병 등의 직위를 역임하였는데


용병술이 뛰어나나 동안현에서 토목공사를 감독하던 중 재물 반출을 금지했다는 이유로 병사들이 반란과 약탈을 일으켜 탄핵당했음


이후 정유재란에 조선에 파병되면서 이순신과 만나 협력하게 되었는데


부임할 때부터 찰방(지방의 역참을 담당하는 관리)이 송별식에 늦었다고 마구 때리는 등 횡포를 많이 부렸음


이에 충무공이 휘하 장수가 거둔 수급을 양보하는 한편 큰 잔치를 열어 대접하는 등 당근을 주었고


반대로 명군의 횡포가 심해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흩어졌으니 더 싸울 수 없다며 채찍으로 WWE를 시전하기도 했음




이후 명군의 감찰로 인해 진린이 거둔 수급이 거짓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순신과 화해하게 되었고


점차 충무공의 뛰어난 군재와 카리스마를 보며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자신의 휘하 병력 감찰권을 내어주는 등 무례하게 굴지 않았음


당장 이순신에 대한 진린 본인의 증언만 해도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란 말을 남겼고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으니 달아나는 왜 수군을 쫓지 말라는 본국의 명령도 씹고 이순신을 도와 노량해전에 참전하기까지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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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파병된 명군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거짓. 


"조선은 대대로 공순하다고 일컬어졌는데 마침 곤란을 당했으니 어찌 좌시만 할 것인가. 

만약 약자를 부축하지 않으면 누가 은덕을 품을 것이며, 강자를 벌주지 않으면 누가 위엄을 두려워하겠는가. 

더구나 동방은 바로 팔다리와 같은 번방(藩邦)이다. 그렇다면 이 적은 바로 집뜰에 들어온 도적인 것이니, 

그를 저지하고 죄를 주는 것은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조선에게는 진심이었던 만력제 덕분에 명나라가 지원 하나는 존나 화끈하게 던져줬음


무려 당시 1년 세입이었던 400만냥의 두 배에 가까운 780만냥을 전쟁비용으로 지출했고


산둥성의 창고를 털어 쌀 백만 석(약 9만 톤)을 지원했는데, 이는 운송비용을 제외하고도 현재 가치로 약 6600억원 수준임


또한 5만이었던 파병군을 20만으로 늘려서 조선군은 11만이었던 체급을 3만까지 줄이며 비용과 인명을 절감할 수 있었고


전후 복구비용으로 자신의 사재를 털어 은 200만냥을 보내기도 하였음


오죽했으면 이여송은 휘하의 군마에게 줄 마초(풀먹이)가 없어 굶겨 죽이기까지 했다는 기록이 존재함




또한 파병된 명나라군도 절대 잡졸이 아니었고, 벽제관 전투같은 패전을 제외하고도 평양성 탈환처럼 명백한 단독 승전 사례가 있음


벽제관도 만력제의 명령 때문에 최대한 빨리 조선을 구원해야 하니 무리하게 남하하다가 매복에 걸려 패퇴한 전투였고


그 후로는 임진강으로 후퇴해 전선을 고착화하면서 행주대첩으로 승리한 조선군과 함께 왜군을 샌드위치로 만들었으며


포위당한 왜군이 한양을 포기하고 달아나게 만드는 성과도 올렸음




정유재란에서도 직산 전투의 승리와 사로병진작전으로 울산, 사천, 순천을 동시에 공격하다가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전쟁이 끝났음


만약 명군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칠천량의 대패로 남해의 제해권을 회복한 왜군이 다시 경상, 전라, 충청도로 진군할 때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또다시 런조가 가마 엔진에 시동걸고 튀었어야 했을 것임


즉 명군의 역할은 조선의 부담을 줄여주면서 힐도 걸어주는 딜탱 겸 서폿이었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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