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알아보는 경제학파와 세계 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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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애덤 스미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경제는 하나의 독립된 학문체계로 발전하기 보다는 정치와 철학의 일부로 여겨졌음
당연히 한 국가의 경제 정책은 귀족과 왕족의 기득권과 통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기 마련이었고,
이것이 중세를 거치며 하나의 정치적 이념으로 강화된 것이 바로 중상주의임
(물론 중상주의 시절에는 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없었으므로 중상주의 경제학파는 존재하지 않음)
가장 대표적인 중상주의자를 꼽으라면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경제 관료 장바티스트 콜베르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중상주의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각 국가들이 금, 은 등의 귀금속을 놓고 펼치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으로
"어떤 국가를 다른 국가보다 위대하고 부강하게 만드는 단순하고 유일한 힘은 나라 안에 돌고 있는 풍부한 돈이다"
라는 콜베르의 어록으로 알 수 있듯, 수량이 한정된 귀금속(기축통화)을 무역을 통해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바로 중상주의의 핵심임
이 당시 유럽의 각 국가들은 무역을 통해서 자국의 상품을 판매하고 그 대가로 금과 은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했는데
이러한 귀금속의 수량은 당연히 한정되어 있으므로 당시의 무역은 이를 서로 뺏고 빼앗는 제로섬 게임이 되어버렸음
따라서 국가는 수입(화폐유출)은 줄이고 수출(화폐유입)은 늘리는 보호무역주의를 자연스럽게 채택하게 되었고,
물건을 수송하는 상선의 증대와 더불어 원재료 수입 / 가공품 수출을 위한 해외 식민지를 적극적으로 확보해나가게 되었음
한편 대영제국은 무역을 통해 확보한 은으로 중국에서 찻잎과 비단 등을 수입하고 있었는데,
청나라는 노동력이 워낙 값싼데다 가내수공업 물량도 막대해 도저히 자국의 상품을 수출할 수가 없었고
일방적인 무역적자를 기록하면서 막대한 양의 은이 중국으로 유출되기만 하는 실정에 놓여있었음
결국 이들은 아편을 팔고 그 대가로 사치품 수입에 썼던 은을 다시 뜯어온다는 미친 계획을 실행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청나라 몰락의 서막인 아편 전쟁의 원인이 되었음
중상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무역적자란 결국 국가의 부를 해외로 유출시키는 심각한 행위이므로,
당시 영국에서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함 (그래도 사람새끼 아님)
이런 중상주의는 당연히 문제점과 그 한계가 매우 명확했는데,
국가 내부에 잉여자본을 쌓아두는 것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재투자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식민지와 무역으로 확보한 금과 은을 새로운 화폐로 찍어내는 것에 몰두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을 유발했으며
결국 이것이 경제 성장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매우 비효율적인데다
금과 은을 모으는데만 혈안이 되어 생산자(노동자)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상업/경제 활동의 이미지를 부정적이게 만들었음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처럼)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보이지 않는 손')은 이런 중상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단순히 국가가 재화를 쌓아놓기만 하는 행위는 국가의 부의 증대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회 전체의 부 또한 증가한다고 생각했음
시장의 각 주체들이 자신의 이익에 맞게 행동하면서 자연스럽게 결정된 수요와 공급의 균형점이
국가나 거대 자본이 생산과 무역에 일일히 간섭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여겼는데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탄생한 경제학파가 바로 '고전학파'임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시장가격기구의 기능을 매우매우매우 신뢰했기 때문에
시장을 통해 자원이 배분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고,
일시적으로 시장의 가격 균형이 깨지더라도 즉시 새로운 균형점으로 이동한다는 '시장청산' 개념을 신뢰했으며
중상주의에서 강조되었던 보호무역이나 규제 등으로 시장을 제한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오히려 이러한 정부의 조치는 경제의 효율성만 깨트리는 행위라며 강하게 비판했음
고전학파가 탄생한 시기는 19세기로, 이 당시 유럽은 상당한 경제적 호황을 누리며 전례없는 황금기를 보냈기 때문에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
(공급이 수요를 견인한다)
하에 자신들의 경제적 이론을 전개해 나갔고
공급과잉이 발생하더라도 즉시 시장에서 새로운 가격이 설정되며 균형을 찾아가기에
고전학파는 '공급과잉이라는 사태는 발생할 수 없다'고 생각했음
절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법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유럽의 경제적 호황기도 저물어 버리고
1920년대 후반에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이 찾아오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음
고전학파는 공급이 수요를 스스로 창출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시장은 효율적이기 때문에 내버려두면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가기에 정부 개입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대공황으로 대규모 실직이 발생하면서 물건을 만들어도 사줄 사람이 없었고
과잉공급은 없다고 주장한 고전학파의 이론은 대공황이라는 현실과 맞지 않았음
"야 이 고전학파 새끼들아. 대공황으로 사람들 다 뒤지고 나서 균형 찾아가면 그게 균형임?" (약?간의 날조 있음)
영국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결국 시간이 지나면 어쨌든 균형을 찾을거라며
대공황에도 시장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고전학파를 비판하면서
시장이 불균형 상태에 놓여있는 경우,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불균형을 해소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음
또한 고전학파가 굳게 믿고 있던 '공급이 수요를 견인한다'던 세이의 법칙도 부정하면서
오히려 '(유효)수요가 고용과 생산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였는데
대공황 상황은 대규모 실직으로 인해 유효수요가 부족한 상황이니
정부지출로 모자란 유효수요를 충족시켜 시장의 불균형을 적극 해소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음
이런 케인스의 정책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 계기가 바로 미국의 뉴딜정책으로,
정부가 농산물의 과잉생산을 통제하고 각종 대규모 개발사업을 추진하며 모자란 유효수요를 창출해낸 덕분에
대공황 이전 수준으로 각종 경제 지표들을 돌려놓는데 성공하며 케인스의 이론이 현실에 부합한다는 평가를 받게 만들었음
그의 이론을 따른 경제 학자들이 바로 케인스학파이고, 맨큐의 경제학으로 유명한 그레고리 맨큐 또한 케인스학파로 분류됨
(물론 일부 관점에서 볼 때 새케인스학파로 분류되는게 올바른 표현이겠지만 여기서는 맨큐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
사실상 케인스학파가 등장하며 본격적으로 거시경제학이라는 분야가 활발하게 연구되고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아직까지도 경제학계에서 이론적 기초에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경제학파이기도 함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케인스학파의 위상에 큰 흠집을 내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1970년대에 발생한 오일쇼크임
오일쇼크는 중동의 산유국들이 석유의 무기화를 시도하며 의도적으로 석유 생산량을 줄여버린 사건인데
이 때 원유 가격이 약 4배 가량 치솟으며 덩달아 각종 원재료 값도 폭등하기 시작했고
높아진 생산비용으로 인해 생산은 감소하고 실업률은 높아지면서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발생했음
이러한 현상을 바로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함
문제는 당시 케인스학파의 주장에 의하면 이러한 경기침체에는
대공황 시절의 뉴딜정책처럼 정부가 총수요 관리정책을 통해 시장에 개입해 유효수요를 창출해야 하는데
문제는 오일쇼크는 수요의 부족이 아니라 석유 감산으로 인한 공급의 부족으로 초래된 경기침체였고
총수요고 자시고 그냥 석유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 정부 개입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사태였음
또, 케인스학파 경제학자들은 인플레이션율과 실업률은 서로 반비례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며 (필립스 곡선)
이를 토대로 정교한 총수요 관리정책을 통해서 낮은 인플레이션과 높은 고용률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정부 관료들이 각종 규제와 개입을 통해 경제에 개입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해왔는데,
오일쇼크 당시 물가도 치솟고 실업률도 같이 높아지는 현상이 발생하자 케인스학파의 주장이 설득력을 잃기 시작했음
"그거 봐, 정부개입으로는 안 되잖아 케인지언 새끼들아 ㅋㅋ" (날조 많이 있음)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학자들은 케인스학파가 주장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음
그의 대표적인 주장으로는 '인플레이션은 어디까지나 화폐적 현상이다'를 꼽을 수 있는데,
이는 곧 케인스학파가 주장한 정부지출의 확대는 오히려 인플레이션만 가중시킬 뿐
정부지출을 늘려봐야 실제로 실업률을 낮추는 것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음
그는 케인스학파가 강조했던 정부지출의 확대보다는 정부 역할의 축소를 강조했고
정부의 각종 규제와 개입이 오히려 인플레이션과 경제적 비효율성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민간 주체들이 계획을 세우고 합리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일정 준칙을 설정하고 이를 지킬 것을 제안했음 (k% 준칙)
밀턴 프리드먼의 지적에 케인스학파는 실제로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1920년대부터 세계 경제를 주름잡던 케인스학파는 프리드먼의 지적을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이론을 수정해야만 했음
(▲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자로 꼽히는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그는 1976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며 지금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했고,
프리드먼의 이론을 따르는 경제학자들을 '통화주의학파'라고 부름
통화주의학파의 이론적 배경에는 케인스학파에게 밀려났던 고전학파의 주장이 깔려있기 때문에
통화주의학파를 가리켜 고전학파를 계승했다고 말하기도 함
(통화주의학파 이후에도 새고전학파, 새케인스학파 등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여기는 도저히 학부 수준보다 더 쉽고 간단하게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스킵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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