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天下承平日久,多不習兵,須陀獨勇決善戰
당시
천하가 평안한 날이 오래되어, 많은 자들이 병사에 익숙하지 않았는데
, 오직 장수타만 용기와 결단이 있고 전투에 능하였다. ㅡ 수서 장수타열전
대규모 동원은 맞으나, 이미 수 본토는 문제 시기부터 평시체제로 이행한 지 오래였음
府兵之制,起自西魏、後周,而備於隋,唐興因之。
부병제는 서위(西魏)와 후주(後周)에서 시작되어 수나라에서 완성되었고, 당나라가 이를 계승하였다. ㅡ 신당서 병지
당나라는 수나라의 부병제를 그대로 계승해서 이용했는데
太宗貞觀十年,更號統軍為折沖都尉,別將為果毅都尉,諸府總曰折沖府。
凡天下十道,置府六百三十四,皆有名號,而關內二百六十有一,皆以隸諸衛。
凡府三等:兵千二百人為上,千人為中,八百人為下。
정관 10년, (당)태종은 통군을 절충도위(折冲都尉), 별장은 과의도위(果毅都尉)로 개칭, 각 부의 명칭은 절충부(折冲府)로 정했다.
전국 10개 도에 634부를 두었고, 관내 260부는 위(衛)에 예속되어 있다.
부(府)는 3등급으로 나뉘는데, 상은 1,200명, 중은 1,000명, 하는 800명이다. ㅡ 신당서 병지
내전 직후 전시체제 유지 중이던 당나라가 634부 두고 부 1개 당 평균 1,000명의 병사를 배치함. 이론상 전 부가 완편되어 있다고 쳐도 전군 70만 넘기 힘든 상태임
奚、契丹兩蕃强盛,數寇河北諸州,不置府兵,畨上以備兩蕃,諸道共六百三十府,上府管兵千二百,次千下八百,通計約六十八萬,右左衛各領府六十餘衛,領府自五十下至四十七,東宫六率,領多至六少,至三而已。
해(奚)와 거란(契丹) 두 이민족이 강성하여 자주 하북(河北)의 여러 주를 침략하였으나,
부병(府兵)을 두지 않고 변경의 군대를 배치
하여 두 이민족에 대비하였다. 여러 도(道)에 걸쳐 총 630개의 부(府)가 있었으며, 상부(上府)는 병사 1,200명을, 차부(次府)는 1,000명을, 하부(下府)는 800명을 관리하였다. 이를 모두 합치면
약 68만 명
이었다. 우위(右衛)와 좌위(左衛)는 각각 60여 개의 부를 통솔하였으며, 각 위가 통솔하는 부의 수는 많게는 50개에서 적게는 47개였다. 동궁(東宮)의 육율(六率)은 많게는 6개 부를, 적게는 3개 부를 통솔하였다. ㅡ 옥해 138권
다른 기록 보면 부병과 변경 수비군, 지방군 총합 =
약 68만
그냥 기록만 봐도 113만 못 뽑고 못 투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