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과 청나라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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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부터 막대한 행운이 따라주었다.
청나라의 시조인 누르하치는 1588년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당시 만주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당시 명나라도 아무리 암군이라고 불리우는 만력제가 제위하고 있던 시절이라고 해도 요나라, 금나라때 기억으로 만주를 하나로 통일하는 세력이 등장했을때 무서움을, 유목민족들이 단결했을때 나오는 가공할 전투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급성장을 할려고 하자 명나라는 당시 누르하치가 더이상 급성장을 하기 전에 본격적으로 견제할려고 했고 당시 누르하치 세력은 만주에서 가장 큰 세력이였다고 하지만 아직은 만주도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했고 상황이고 당시 명나라는 쇠퇴기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나마 국력이 천계제, 숭정제때와 비교하면 아직은 강성했던 상황이여서 당시 명나라가 본격적으로 대군을 동원해서 누르하치를 압박하면 당시 여기저기 다른 여진족 부족들과도 전쟁을 하고 있는 누르하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사망 플래그였지만 타이밍 기가 막히게도 그때당시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자신들 스스로 일본군을 막기 역부족이였던 조선이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명나라에서 당시 요동의 병력 대부분을 자신들 봉신국인 조선에 파병하는 바람에 더이상 누르하치 세력을 신경쓸수 없게 되었고 그틈에 누르하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본격적인 만주통일 사업에 나서서 빠른 속도로 주변에 여진족 부족들을 복속시켰고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이어 양응룡의 난마저 진압했을때 당시는 상당히 지쳐있는 상황이고 누르하치는 이미 그사이에 급속도로 성장해서 더이상 명나라가 누르하치 세력을 손쉽게 제압할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임진왜란)
일본역시 미국에 의해서 사실상 강제로 개항을 한후 미국내에서 남북전쟁이 터져서 일본에 더이상 신경쓸수 없게 되고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로도 남북전쟁이 워낙 대규모 전쟁이여서 한동안 전후복구를 해야 하는데만 신경을 써야했고 그 사이에 일본의 사츠마와 조슈번은 보신전쟁을 통해서 재빨리 에도막부를 무너뜨려서 자신들끼리 내전을 외세가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전에 끝냈고 이후 빠르게 근대화를 진행하면서 미국이 남북전쟁의 전후복구를 다 했을때는 이미 일본은 국력이 급상승하고 빠르게 근대화를 하고 있는 더이상 손쉽게 제압할수 없는 상태였다.
(남북전쟁)
2 때가 올때까지 기다렸고 그 기회를 상대가 스스로 제공해주었다.
누르하치가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얼마안가 죽고 홍타이지가 후금의 한으로 즉위한 이후 홍타이지는 영원성을 공격했지만
또다시 원숭환에게 패배하고 금주성 공격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지금 자신들 전력으로는 산해관의 방어선을 무너뜨릴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명나라와 잠시 휴전을 한다음 내몽골 지역의 주변 몽골부족들마저 확실하게 복속시켜 자신들 전력을 강화시키고 병자호란으로 조선마저 복속시켜 후방까지 확실하게 안정화 시킨다음 자신들이 복속시킨 내몽골 지역을 통해서 산해관을 우회해서 끊임없이 명나라 화북지역을 약탈했고 명나라는 그런 상황에서 자국 최고의 영웅인 원숭환을 죽여서 스스로 산해관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원숭환이 사라졌다고 당장 산해관의 방어선이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자국내 최고 명장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자 산해관을 지키던 수많은 장수들이 후금에 투항하면서 사실상 산해관의 방어선을 명나라 스스로가 크게 약화시킨 셈이 되고 말았다.) 거기다가 명나라 내에서 대규모 반란이 이자성이 난이 일어나면서 명나라는 그야말로 망국을 피할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명나라 말기 최대의 농민반란인 이자성의 난)
일본역시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자 지금 당장은 청나라와 전면전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란걸 알고 청나라와
전면전을 피하고 10년동안 자국내 근대화를 해서 내부를 다지는데 집중하면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수 있는 기회가 오길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1894년 조선내 대규모 농민반란이 동학농민난이 터지고 그걸 스스로 자신들의 군사력만으로 진압을 하지 못한 조선이 스스로 청나라 군대를 끌여들임으로서 텐진조약에 의거해서 일본군 역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수 있게 되자 일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에 한양으로 군대를 파견해서 조선의 경복궁을 기습해서 조선의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의 왕인 고종을 포로로 잡아서 자신들 친일정권을 세울 명분으로 강제로 개혁을 강요하고 자신들 입맛에 맛는 친일정권을 세우고 조선을 집어삼킬려고 하는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만이 중국의 위협에서 일본역시 벗어날수 있다는 명분으로 청나라 함대를 기습공격해서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청일전쟁에서 압승을 거두어서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몰아내고 청나라 예산의 2년치 일본 예산의 4년치에 해당하는 막대한 배상금을 뜯어내고 대만을 전리품으로 할양받는 막대한 이득을 누리게 된다.
(조선말기 최대의 농민반란인 동학농민운동)
3 당시 주변 상황, 환경이 자국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청나라가 부흥했던 17세기는 당시 전세계적으로 소빙하기로 전세계적으로 기운이 매우 떨어졌다. 이것은 청나라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는데 대표적으로 병자호란 당시 매운 추운 한파로 압록강에서 한강까지 조선의 강들이 군대가 지나갈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게 얼어서 청나라 군대는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빠르게 남진해서 조선을 복속시킬수 있었고 명나라하고 전쟁때도 청나라는 소빙하기로 작물들이 쉽게 얼어죽어서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도 부유한 명나라 화북지역을 약탈해서 자국내 경제가 돌아갈수 있었지만 청나라와 같은 약탈경제가 아닌 농사로 먹고 살던 명나라는 그야말로 자국내 식량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는 상황에서 청나라군대에게 화북지역이 약탈로 초토화가 되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명나라의 대기근으로 명말기 최대 반란인 이자성의 반란까지 일어나서 내부와 외부에까지 적을 맞게된 명나라는 결국에는 무너질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다.
(17세기에 일어난 소빙하기)
일본역시 일본이 본격적으록 급성장하면서 부흥하기 시작한 19세기 말에는 당시 패권국은 영국과 러시아로 서로 그레이트 게임으로 패권 경쟁을 하던 시대였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압승을 거둔 이후 러시아의 삼국간섭으로 힘들게 얻은 요동반도 마저 다시 토해내고 조선마저 러시아에 의해서 사실상 영향력을 빼았기게 된 위기의 상황에서 당시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하던 영국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압승을 거두자 일본을 위해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 동맹을 맺고 본격적인 후원자로 일본을 지원해주고 그런 영국의 지원을 얻어서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킬수 있었다. 거기다가 당시 러시아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역시 그로인해 러시아에 깊은 원한을 품은 수많은 유대계 자본가들이 일본이 러일전쟁에 이길수 있도록 군비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어서 일본은 자금부족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등 일본에게 매우 호재로 작용했고 거기다가 당시 일본이 러시아에 파견한 일본의 첩자인 아카시 모토지로가 러시아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선동했고 그런 자국내 시위들을 러시아는 총질을 가하는 무력으로 진압하는 최악의 수를 둔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러시아내 대규모 혁명 시위들이 빗발치게 되었고 그로인해 러시아는 자국내 내부 문제들을 해결하는게 신경쓸수 밖에 없어 더이상 일본과의 전쟁에 집중할수 없게 되어서 결국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의 지배권을 장악할수 있게 되었다.
(19세기 당시 패권경쟁인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
청나라나 일본이나 둘다 하늘이 청나라는 중국을 일본은 조선을 먹으라고 밀어주는 식으로 막대한 행운이 찾아왔고 그런 행운이
올때까지 빈틈을 보이지 않고 상대가 허점을 보일때까지 기다리다가 막대한 행운이 찾아오자 결코 놓치지 않고 그 행운을 기회로 적극적으로 잡아서 활용해서 결국에는 자신들의 목표를 이룰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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