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피라미드를 보고 시대적 한계를 운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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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하수여행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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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는 쌈뽕하다. 피라미드 파워다.

사실 이는 당대 피라미드가 철학과 공학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기에 피라미드 = 시대인데, 거기에 무슨 시대적 한계라는 주석이 필요하겠냐.


시대는


그냥 시대지.



시대에 ‘시대적 한계’라는 표현을 덧붙이는 건 ‘역전앞’처럼 불필요한 중복일 뿐이다



우린 인간 그 자체를 보고 저게 좆간의 한계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인간의 행위와 그 부산물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지.



쉽게 말해서, “우와 저걸 4000년 전에 만들었다? 존나 쌈뽕하다!” 생각하고 말지.


이집트에는 도르레가 없었다느니, 중앙집권 신정 국가라 그만한 동원력이 있었다느니, 저게 다 대민복지라느니…


저 시대를 서술하는 많은 이유와 그 한계점은 우린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이해하기보다는 동경하고자 한다.


그저 피라미드의 쌈뽕함만을 생각하고 기억하고 이를 그대로 추억하려고 든다.


언제나 그저 소수의 몇 명만이 잠깐 피라미드에 대해 궁금증과 그 장엄함을 토로할 뿐이다.


고대 이집트학 전공이 한국에 몇 명이랬더라? 다섯 명도 안 된다고 들었는데. 그야말로 학자의 영역이다.



사실 깊게 따지자면 학자의 수의 문제도 아니다.


공룡은 특정 시대를 상징하는 존재이고, 우리 옆의 새가 사실 공룡이라 해도

우리는 현대 새를 보며 공룡 시대를 떠올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공룡을 공룡시대를 이해하기보다는 동경하고자 한다.


그렇다 결국 시대가 다르다 여기면 같은 것이라도 전혀 다른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 사람들이 보기에 새는 새요 공룡은 공룡이다. 바로 둘의 시대가 다르다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린 왜 이 둘을 다르다 여기는가.


철학이요 공학이다.


붓다의 가르침처럼, 각자 가진 관점에 따라 보이는 세상은 달라진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 그 소리 맞다.


사실 우리 모든 인간은 다 제 안의 철학과 공학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인간은 거기서 중립적일 수도, 또 자유로울 수도 없다. 새장 속 새요 영화 속 조연이다.


그렇기에 우리 뇌는 진정한 시대 앞에서 그 외의 것들을 굳이 고려하지 않는다는 걸 우린 먼저 알아야 한다.

철학은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색상이자 굴절도요, 공학은 그 세상의 투명도이자 세밀도다.

거기서 예외는 없다. 그렇기에 시대는 그저 시대로서 존재 할 뿐이다.


턱수염과 콧수염이 보기에는 이 시대는 온 세상이 휴거 직전의 세상일 것이요, 
어느 학자가 보기에는 온 세상이 만물의 상호작용일 것이다. 세상이 시대로서 투영 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 어떤 인간도 세상과 시대와 상호작용하는 한 그 속에 있는 철학과 공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맹인과 귀머거리조차도.


그렇기에 우리는 철학과 공학의 정수가 담긴 시대를 상징하는 피라미드를 통해, 그 시대 정신의 본질을 온전히 체감한다. 정확히는 체감한다 가정한다. 마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 같은 공룡 시대처럼


누구는 장엄하다고 여길 것이고, 누구는 덧없다고 여길 것이고, 누구는 저게 인간이 쌓을 수 있음을 부정하고 우선 외계인의 존재를 생각할 것이고 혹자는 천지창조를 주장할 것이다.


그만치 피라미드는 당시 철학과 공학이 총합된 결과물로서, 또 인간이 쌓아올렸다는 그 부분으로 그 시대를 상징하는 동시에 그 시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세상은 언제나 그 시대를 통해, 또 시대는 언제나 철학과 공학으로서 우리에게 비쳐진다.


그렇기에 세상에 시대정신이 있다면 피라미드가 시대정신일 것이다.


그리고 우린 법학과 의학을 추구하는 세상, 또 법학과 의학에서 구도(求道)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법학은 그 사회의 한계, 그 시대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언제나 ‘시대적 한계’라는 말이 뒤따라온다.


의학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 의학도 법학도 그것은 사실 시대가 아니다. 당연 거기에 인류 공통의 가치란 없다.


나 따위가 감히 그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들은 달보다는 손가락에 한없이 가깝다.


따지자면 이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그 사실적시에 가깝다.


내 뇌피셜이 아니라는 증거?


미국에서 흑인·히스패닉·인도 출신 이민자들이 한없이 의사와 변호사가 되려고 노력하고 또 된들

그래서 그들이 오늘날 정말 그 사회의 주류 세력이 됐는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답은 아니요다.


전문직 수만명보다 마틴루터킹이나 마이클잭슨이 더 흑인사회를 사회 주류세력주장자정도가 되게 하였다.



그렇다면 분명 흑인도 아니고 엄연한 국가의 주류시민인 우린 왜 이다지 고통받는가.


왜 이토록 차별 받는다 느끼는가 그리 여기는가



사실 
우리는 마음속으로는 어떤 웅장한 시대정신(피라미드)을 그리지만


정작 그런 총체적 상징을 갖지 못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랜즈가 박살난 카메라요 파괴된 마천루다.


남녀갈등 세대갈등? 그런 건 없는 세상이 없었다.

급격히 발달한 이 정보화사회도 갈등의 증감의 변명는 될지라도

이 지독한 내적 갈등과 갈망의 존재의 이유가 될 순 없다.



내가 보기엔 단지 거기엔 시대 정신이 있었고 우린 지금 그게 없다.



우린 공학이 낙태 당하고 철학이 사산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그게 그 이유다.


우린 어느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기에 우리에게 시대정신이 있는가 묻는다면, 일개 인간인 나는 감히 없다고 조심스럽게 답하겠다.



눈물이 증거라는 게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고통이 곧 그 철학적 증명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르침처럼, 모든 고통과 분노, 슬픔은 결국 내면에서 비롯된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느끼는 고통 자체가 시대정신이 부재함을 드러내는 증명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의 모든 곁 가지를 벗긴다면 이민자의 나라란 시대정신이 남지만


다 벗겨버린 우리에겐 뭐가 남는가 민족주의와 배금주의의 파멸? 아니 과연 뭐가 남아있긴 한 가?



사람들이 부평초처럼 흔들리고 있다. 사람들이 중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진정으로 구도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미래먹거리’라는 목표가 아니다.



그러한 미래를 창출할 수 있는 근원적 힘, 즉 피라미드 파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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