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여성들의 희생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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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곡노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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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여성들의 해외 인신매매의 역사는 수백년전부터 아주 오래되었다.

수백년전 일본 전국시대부터 그 역사는 시작되었을 정도다, 당시 일본은 오랫동안 전쟁으로 일본의 영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자금이 필요했고 당시는 아직 본격적인 은광개발도 시작되기 전이여서(본격적으로 일본이 대대적으로 은광개발을 하면서 막대한 수입을 벌기 시작한건 에도시대 부터다.) 일본은 마땅히 해외에 팔말한 수출품이 없는 상황이였고 결국 부족한 군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국 여성들을 해외로 수출을 해서 돈벌이 장사를 해야만 했다.  

1542년 포르투갈의 선박이 처음으로 일본에 접촉한 이후부터 일본은 자국 여성들을 돈받고 해외로 인신매매를 하기 시작한다. 당시 서구인들에게 있어서 일본의 자국 여성들 노예 시장은 그야말로 매력적인 것이였다. 당시 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오늘날의 값으로 따지면 20만엔 정도에 거래가 되었는데 일본의 전국시대 영주들을 자국 여성들을 오늘날의 값으로 6만엔 정도의 가격으로 판것이다.  당시 화약통 하나 가격이 지금 시세로 60만엔 달했고 즉 화약통 하나 살 돈으로 일본 여성을 10명을 살수 있을 정도로 그야말로 자국 여성들을 헐값에 내다 판 것이다.

서양에서 노예란 물건이란 가축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일본에게 있어서 노예란 일종의 채무를 떠안은 같은 인간이였다. 즉 채무만 다 치루면 다시 자유민 신세가 될수 있는 것이다.

판매가격의 책정이 (책무+이익)이기 때문에, 서양에서 거래되는 노예보다 가격이 싼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전국시대 수십년동안 해외에 인신매매로 수출된 일본 여성들의 규모가 정확히 얼마인지 파악이 되지 않지만 오늘날의 학자들은 수십만은 과장이고 현실적으로 5만명 내외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여성들의 해외로 인신매매는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국 여성들이 해외로 인신매매 되고 있는 사실에 분노해서 일본 여성들을 해외로 인신매매를 하는것을 금지하면서 막을 내린다.


그러한 해외 인신매매가 수백년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가라유키상으로 다시 부활한다.

당시 일본은 막 근대화를 시작하는 후발국가였기 때문에 근대화를 하기 위해서 막대한 돈이 필요했고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 미국처럼 공업 능력이 높지 않았던 그들과 수출경쟁에서 크게 뒤쳐졌던 일본은 자국 여성들을 해외로 수출해서 인신매매로 팔아 치워서 근대화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는 것을 선택한다.

당시 핀푸라 불리우는 알선업자들이 일본전역을 돌아다니며 가정 형편이 어려운 소녀들에게 일자리 알선을 미끼로

외국행을 제안하고 해외에서 일하게 해주겠다고 속여서 표적이 된 여성들의 부모들이 동의하며 급여 선지급 등 명목으로 일정금액을 부모에게 제공하고 그렇게 되면 부모는 딸을 브로커 등의 처분대로 전부다 맡기겠다는 증서에 서명하는 식으로 돈을 이루어졌다. 알선업자들은 이렇게 부모에게 돈을 건네후 다시 이들을 포주에게 넘기면서 알선업자들은 수수료를 받는 식으로 차익을 챙겼다.

이후 해외로 팔리게 된 여성들은 외국에 도착하는 순간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었고 가족들이 받은 선금은 물론, 브로커 수수료, 외국까지 오는데 등 교통비 등 을 전부 빚으로 떠안은 상태로 강제로 외국남성들을 대상으로 성매매 매춘을 해야만 했다. 가라유키상들은 자신들이 돈을 벌어도 그중에서 절반은 포주에게 넘겨야 했고 나머지 절반도 빚 이자를 갚고 또 매주마다 시행하는 성병 검사도 전부다 가라유키 상들이 지불해야 되는데 이마저도 일반 비용의 2배로 덤탱이를 씌웠기 때문에 사실상 가라유키상들이 실질적으로 손에 쥐는 돈은 그야말로 쥐꼬리 만한 수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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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통킹 지역에서 활동하던 가라유키 상들.


가라유키상이 모집과정부터 사기로 명백한 불법이였지만 일본정부와 일본경찰은 자국 여성들을 수출해서 근대화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이를 묵인하여 주었다. 이러한 가라유키상들이 벌어오는 막대한 외화는 일본은 훗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등 자국이 전쟁을 하는데 필요한 군자금도 마련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1904년에는 러일전쟁을 앞두고 헌납운동이 벌어지자 가라유키상들은 매춘으로 자신들이 힘들게 모은 돈들을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중요하게 써달라고 헌납했고 그렇게 가라유키상들의 자발적인 헌납으로 모인 돈만 5천달러에 달했다.(지금 환율로 계산하면  1조원 가까이 되는 거액이다.) 그뿐만 동남아등 해외 지역을 지나가는 러시아 발틱함대를 보고 그 이동정보를 일본군에게 전달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보들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할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고 또한 가라유키상들을 스스로 자원하여 일본군을 위한 종군위안부 역할까지 하였다. 또한 일본은 자국 군인들한테 해외 항구에 정작해서 쉬게 되는 날이되면 무조건 해외여성들이 아닌 가라유키상들을 대상으로 성적욕구를 풀라고 하였고  이것은 해외에서도 일본 여자를 상대하게 함으로서 외화가 해외로 유출되는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가라유키상들은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고 제국주의 열강이 되는것에 성공하면서 국제적으로 위상이 올라가자 더이상 필요가 없어졌고 해외에 눈치도 신경써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인신매매를 대대적으로 단속하면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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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베리아 니콜라예프스크에 있던 일본군을 위한 가라유키상 위안소 거주지


가라유키상들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매춘으로 돈을 벌어도 그중에서 절반은 숙박료, 손님 제공료 등으로 포주에게 제공되었고 나머지 돈들도 빚이자를 갚고 또한 매주 시행되는 성병검사역시 모두 가라유키상들의 돈으로 치루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2배로 덤탱이를 씌웠기 때문에 실제로 가라유키상들의 생활은 매우 궁핍했으며 하룻밤에만 수십명의 손님을 받는 경우도 잦았고 휴일에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였고 거의 대부분의 가라유키상들은 20대에 성병이나 말라리에 등에 걸려 더이상 매춘을 못하게 되면 바다나 정글에 버러져 무덤도 없이 죽어가야 하는 신세였다. 수십년동안 해외로 팔려간 가라유키상들은 규모는 대략 50만명 내외로 추정된다.


조국에 의해 사실상 강제로 해외로 인신매매로 팔려가서 지옥과 같은 인생을 살았는데도 러일전쟁 당시 어떻게든 자신의 조국인

일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자신들의 피땀으로 힘들게 모은 돈마저 자발적으로 모아서 중요한 군자금으로 쓰는데 도움이 되나고 헌납하고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승리할수 있게끔 지구 반바퀴를 돌아서 항해하고 있는 러시아 발틱함대가 보이면 그 이동정보를 

일본군에게 전달해줄려고 했던 가라유키상들의 희생에 뭉클하면서도 너무나도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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