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 아님) 전방후원분과 출토 유물들로 알아보는 백제와 왜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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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름눈사람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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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웅진)에서 발견된 일본식 고분인 횡혈묘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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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백제의 핵심지에서 발견되는 횡혈묘들의 주인은 북규슈에서 유행하던 횡혈묘 스타일과 비슷함

또한 부장품과 유골을 조사한 결과, 해당 묘의 주인은 왜인이 맞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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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공주 부여의 횡혈묘 세력들은 같은 일본계 세력인 전남의 전방후원분 세력들과도 활발히 교류한 흔적도 발견됨


도대체 어째서 백제의 수도에 북규슈 양식의 일본인 무덤이 발견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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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에서 이에 대한 증거가 될 만한 기록이 있음(환단고기급 신뢰성이라고 소리 많이 나오긴 하는데, 일본서기 없으면 백제와 가야 역사 60~70%는 그냥 삭제되는 것이라 학자들도 애용하고 있음)

 

5세기 후반, 일본의 유랴쿠 천황이 일본에 인질로 있던 어린 나이의 동성왕을 특히 귀여워 하였고 궁궐로 불러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제로 돌려보내 왕위를 잇도록 했는데,


이 때, 동성왕을 호위하기 위해 축자국(츠쿠시노쿠니)의 군사 5백인을 함께 보냈다는 것임


이 축자국의 위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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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축자(츠쿠시)국의 위치는 바로 '북부 규슈' 였음


따라서 공주(웅진)의 북규슈식 횡혈묘에 묻힌 일본인들의 정체는 바로 동성왕을 백제까지 호위한 왜군들일 가능성이 큰 것


그렇다면 이러한 일본군의 흔적은 백제의 수도에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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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음성 망이산성에서 출토된 갑옷

이 갑옷의 정체는 바로 왜계 대금식 판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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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판갑은 4세기까지만 해도 철판을 세로로 잘라붙인 종장판갑이 있긴 했지만 왜인들이 도래한 5세기에는 한반도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더 이상 판갑을 제작하지 않고 방어력과 기동성이 보다 향상된 찰갑(비늘갑옷)으로 갈아탐


반면 판갑을 횡으로 잘라붙인 횡장판갑은 5세기 일본에서 유행했고, 이는 아직 찰갑의 영향을 받기 전인 일본 고유의 양식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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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대금식 판갑의 경우, 이미 10년도 더 전에 학계에서 왜 고유의 양식으로 확정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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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단순히 왜의 무구를 수입한 것이 아닌, 대고구려, 대신라 최전선의 요충지들을 따라 왜계 갑주들이 대량 출토되는 것은 왜의 무구를 갖춘 일본의 군대가 백제의 요청에 응하여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했다는 것 또한 의미함


이것에 대해서는 상국의 요청을 왜가 받아들인 것인지, 혹은 백제가 일본에게 군사적인 원조를 받은 것인지로 학계에서 아주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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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청주에서도 많은 왜계 갑주를 비롯한 다량의 왜계 유물들이 출토된 것을 알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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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신봉동 고분군은 특히나 많은 왜계 유물들과 무기, 마구등이 발견되어 일본의 군사집단이 있었음을 시사함


그렇다면 문헌자료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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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에 관련 기사가 있음


첨부한 이미지를 보면 부여/웅진 기준으로 청주는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일본서기에는 백제 동방령(=동쪽 장관)으로 '모노노베노 마카부'라는 왜의 장군이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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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중국에선 흑치상지와 함께 당나라로 귀순한 백제 장군으로 모노노베노 슌(물부순)이라는 같은 가문의 장군이 금석문 분석을 통해 밝혀짐


그렇다면 신봉동 고분은 백제의 동방이었으며, 이곳의 지휘관인 동방령은 왜인이었다는 것일까?





아직 단정하는 것은 무리수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되지만, 백제와 왜의 관계는 일방적인 상하의 관계가 아닌,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고 다변화된 관계였다는 것이 고고학적 발굴과 금석문 분석을 통해서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중임


과연 진실은 무엇을 드러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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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낙중, 백제(百濟) 횡혈묘(橫穴墓)의 특징과 의미에 대하여, 국립문화유산연구원, 2019

충북대학교 청주시 신당동 백제고분군 발굴조사보고서,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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