쬬가 역사학자들에게는 그저 GOAT 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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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숨소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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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쬬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국사 역대 TOP5 안에 충분히 들어가는 인물이지만, 이 글에서는 뭐 이사람의 정치적 행적을 평가해서 뭐 갓갓 이런게 아님.


조조의 스노우볼링, 
금비령(禁碑令)
 덕분에 사료가 정말 풍부해졌거든

간략히 설명하자면


1.
 한나라 시기, 잘나갔던 사람들은 무덤 주변에 석수, 석주, 석비 등을 통해

    내가 ~했던 사람이다 라고 알리며, 뽐내는 것이 유행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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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조각상이랑, 거대한 비석들을 밖에 세움


2.
 조조가 약 205년부터 무덤 밖에 비석을 세우는것을 금지(금비령)함. (사치한다고)

무덤 주변에 비 설치하고 이것저것 조각물 세우다보니 귀족들 돈지랄이 되었고, 또 위세있는 놈들은 주변 사람들의 "자발적인" 도움을 받아 세우는 일이 잦아서 금지함

또 귀족들 특유의 프라이드를 억누르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고. 아무튼 한가지 이유만으로는 하지 않았을 거야


3.
 이 때 이후로 실시된 금비령은 꽤 강력하게 실시되고 차차 유행을 탔는지 위진남북조시대, 그리고 그 이후 당나라때까지도 영향을 줘서, 무덤 밖의 각종 조형물과 비석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게 됨

금지했는데 걍 안 만들면 되는거 아니냐고? 그러면 바로 근본 없는 후레자식 행에다가, 내 선조가 잘난 사람이었다는걸 뽐내야 본인 위세도 올라가는 일인데 안할 이유가 없음


4.
 이때 묘비 또한 무덤안으로 들어가면서 묘지(墓誌), 혹은 묘지명(墓誌銘) 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유행하게 됨. (이런 묘지명도 금비령 이전에도 존재하긴 했는데, 묘비로 작성 되었을 것들이 압도적으로 추측됨.왜냐하면 당연히 죽은 사람이 누군지 알리려고 만드는건데 무덤 "밖"에 세우는게 나을테니까)

    

그 전까지 무덤 밖에 놓던 묘비나 석수들은 그 크기와 위엄으로 죽은자의 권세를 드러냈다면,
 
이젠 공간이 한정되어 있는 무덤 "안"에 넣다보니 크기 제한 때문에 최소한 자세하게, 컴팩트하게 이 사람을 드러내야 할테고, 따라서 단순히 크기만 키우기보다는 글로 세세히 알려야겠지?


그래서 아래처럼 생긴 것들이 유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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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뚜껑 (개석)에다가 망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이름 등이나 기원문, 생전에 역임한 관직명, 혹은 시호 등을 간략히 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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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와 같은 지석으로 이사람은 살아생전에 무엇을 한 사람이고 어떤 가문의 누구 자손이고 그 선조들은 무얼 했고 어쩌구저쩌구~ 하다가, 결론에는 “따라서 존나 쩌는 사람이다.” 라고 적어놓음.


이 2가지를 합쳐서 묘지, 혹은 묘지명이라고 부름.



5. 
당연히 무덤 "안"에 있다보니 무덤 밖에 있던 것보다 보존이 잘되고, 글씨들도 풍화가 덜되서 잘보이니, 후세에 역사를 탐구하는 사람에겐 1차 사료로서 정말 개꿀임


덤으로 밖에 있던 석물들은 여러 사건으로 파괴당할/혹은 쌔벼질 일이 많지만, 안에 있는 묘지명은 정치적인 반달리즘은 물론 도굴을 당할지라도 도굴꾼들조차 잘 안 건드리니 설령 무덤이 탈탈 털려도 이것만큼은 살아남는 경우가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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