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동양과 서양 문명 간의 대분기-이유는 불분명하나-가 일어났다 치고
왜 아시아 내에서의 소분기-청은 서세동점에 적응 실패하였고, 일본은 적응을 성공하였는가-가 일어났냐?에 대한 논문임
아시아의 소분기: 1850년 이전 중국과 일본의 국력
https://link.springer.com/article/10.1007/s10887-014-9108-6
청과 에도 막부의 1인당 세입인데, 시작부터도
2배
가량 차이가 나고 이 수치는 갈수록 벌어져 서세동점의 시기인 1850년에는
6배
넘게 차이가 남
그마저도 이는 광세, 상업세 등의 에도 막부에서 널리 거둬지던 간접제에 대해서는 포함하지 않고 오로지 토지세만으로 비교한 값임
총 세수 비교
1850년 경 기준 일본이 중국 인구의 8% 정도
1850년 경 기준 에도 막부의 재정은 중국의 7.5% 정도
그러면 중국이나 일본이나 재정이 엇비슷한가 하면 위의 결과값은 막부 직할지 토지세만(간접세 제외) 합산한 값임.
막부 직할지는 전 일본의 15% 가량에, 각지를 통치하는 다이묘들의 경우는 막부 이상으로 수취하는 경우도 존재
이를 단순 계산하면 면적은 장성 이남으로만 계산해도 청의 1/12도 채 되지 않고, 인구는 8% 뿐인 일본 전체의 세입은 토지세로만 청나라의 40%를 가뿐히 넘는다는 결론이 나옴
또한, 1인당 가용 인프라는 그 이상으로 격차가 벌어짐
1인당 연간 구리주화(금, 은화 제외) 생산량은 2배 이상
평방키로미터당 항구적으로 유지되는 간선도로의 길이는 11배 이상
도시화율도 3배
삼림 면적의 경우에도 에도 막부는 초기와 말기에 큰 변화가 없으나, 청나라는 150년만에 절반으로 곤두박질 침
심지어 1인당 곡물 비축량의 경우에도 1751년에는 청이 압도하였으나, 단 1세기도 안되어 에도 막부에게 처참히 역전당함
유교 국가가 더 나으리라고 예상되는 정부의 구휼 능력도 에도 막부가 압도하는 것은 덤
해당 논문에서는 에도 막부는 타이트한 행정력과 높은 중앙정부의 법적 세율을 통해 거둬들인 재정으로 각지의 인프라에 재투자하여 양의 선순환을 일구어냈고, 반대로 청은 그에 대비되는 방임주의적 지방행정과 비효율적인 정부구조가 체급 대비 처참한 국가적 역량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하였음.
논문의 결론부에서 지적하는 것은 중국 자체가 전근대 국가의 중앙집권적 행정망이 감당하기엔 비현실적으로 크다는 점임. 해당 논문의 저자들이 실시한 모델링 결과에 따르면 서구 제국주의가 없었어도 청은 내리막길 뿐이었으리라고 결론지었으며, 반대로 에도 막부의 경우에는 설령 서구적인 근대화가 없었더라도 꾸준히 발전해나가며 국력의 신장을 이루었으리라 평가함.
더해서 흑선 내항 전에도 정부의 효율성은 이미 심대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고, 이것은 일본의 인문학적 환경에서 기인하며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 역시도 에도 막부라는 성공적인 정치 시스템과 조세 제도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했음.
+1850년대 청나라의 부, 청, 주, 현이 총합 1700여개소인데 비해, 인구 1/8인 전한 시대의 개수는 1600여개, 인구 1/5인 당의 개수는 1800여개, 인구 1/4인 북송 전성기의 개수는 1500여개
이로 보아 관료제가 사회 말단까지 통치역량을 행사하기에는 당나라 이후로 중국이 너무나도 거대해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