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 나오는 군주들 중에 의외로 업적 상당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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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하수여행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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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 파탄자 기믹으로만 알려져 있는 조비


《문제기》


2월 서역의 도시 국가 선선(鄯善), 귀자(龜玆), 우전(于闐)의 왕이 각각 사자를 파견하여 헌상품을 바치니, 조칙에서 말하였다.


- 서방의 오랑캐족이 우임금에 귀의하고, 저족, 강족이 주나라 조정에 복종한 것은 시경과 상서에서도 크게 칭송했다. 최근에 서역의 외민족이 자주 변방에 와서 속국이 되기를 원하고 있으니(款塞內附),(29) 사자를 파견하여 그들을 위로하라.


[29] 응소한서주(應劭漢書注) - 관(款)은 두드린다는(叩) 뜻이다. 모두 국경의 성문을 두드리며 와서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이후, 서역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으며, 무기교위를 설치했다.


후한이 말아먹은 서역 외교관계도 복구했어



오조(五曹) 이십오랑(二十五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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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조(吏部曹)(조직&인사)-7(예부(禮部)로 절반 흡수)

이부랑(吏部郞)

비부랑(比部郞)

사부랑(祠部郞)

의조랑(儀曹郞)

삼공랑(三公郞)

고공랑(考功郞)

정과랑(定課郞)

탁지조(度支曹)(재무)-4

금부랑(金部郞)

탁지랑(度支郞)

고부랑(庫部郞)

창부랑(倉部郞)

오병조(五兵曹)(군사)-5

중병랑(中兵郞)

외병랑(外兵郞)

도병랑(都兵郞)

별병랑(別兵郞)

기병랑(騎兵郞)

좌민조(左民曹)(지방)-8(공부(工部)의 전신, 이부(吏部)와 형부(刑部)로 일부 흡수)

전중랑(殿中郞)

가부랑(駕部郞)

우조랑(虞曹郞)

농부랑(農部郞)

수부랑(水部郞)

민조랑(民曹郞)

이천석랑(二千石郞)

도관랑(都官郞)

객조(客曹)(외무)-1(예부(禮部)의 전신, 이부(吏部)에서 절반 흡수)

남주객랑(南主客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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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위(魏)나라는 선부(選部)를 이부(吏部)로 고쳐 선부(選部)의 사무를 주관하게 하고 또한 좌민(左民), 객조(客曹), 오병(五兵), 탁지(度支)가 있어 도합 5조(五曹)의 상서(尙書)였고, 2복야(僕射)(→좌복야, 우복야)와 1령(令)(→상서령)과 더불어 팔좌(八座)라 하였다.

...

위(魏)나라 때에 와서는 상서랑(尙書郞)에 전중(殿中), 이부(吏部), 가부(駕部), 금부(金部), 우조(虞曹), 비부(比部), 남주객(南主客), 사부(祠部), 탁지(度支), 고부(庫部), 농부(農部), 수부(水部), 의조(儀曹), 삼공(三公), 창부(倉部), 민조(民曹), 이천석(二千石), 중병(中兵), 외병(外兵), 도병(都兵), 별병(別兵), 고공(考功), 정과(定課)의 도합 23랑(郞)이 있었다. (위 명제) 청룡(靑龍) 2년(=234년)에 상서(尙書) 진교(陳矯)가 상주하여 도관(都官), 기병(騎兵)을 설치해 도합 25랑(郞)이 되었다. 늘 1명의 랑(郞)에 결원이 생길 때마다 여러 효렴(孝廉) 중에 문안(文案)을 잘 짓는 자 5명을 밝게 시험해서 뽑고는 그의 성명(姓名)을 조심스럽게 밀봉한 채 상주하여 보임하였다.


향후 2000년간 동아시아 관료조직의 베이스가 되는 삼성육부도 조직했지


후한 말에 과도하게 팽창했던 예부 관련 부서들 쫙 쳐내고

중서(초안)-황문하(심의)-상서(집행) 이 세 큰 틀로 업무과정 할당하고

이호예병(刑)공 여섯종류의 분리된 부서가 대부분(刑 제외) 집행부(상서성) 내로 집결하고 그 외의 기능을 수행하는 부서들은 따로 분류해서 업무효율성 극대화했고
(조비 당시는 刑이 빠진 오조, 刑은 정위가 대신하고 좌민조(左民曹)에 도관랑(都官郞)이 일부사무 처리함)


덤으로 세계 최초의 중앙행정 조직도도 남겨뒀지



(문제가) 왕위에 오르게 되자 조인을 거기장군, 도독형양익주제군사(都督荊揚益州諸軍事-형주,양주,익주의 군무를 총괄)로 임명하고 진후(陳侯)로 올려 봉하고 식읍을 2천 늘리니 예전과 함께 모두 3,500호가 되었다.ㅡ정사 조인전


문제文帝가 왕위에 오르자(220년) 영군장군領軍將軍으로 삼고 앞뒤의 공적을 기록해 동양정후東陽亭侯에 봉했다. 하후돈夏侯惇이 죽자 조휴를 진남장군 가절로 임명해 제 군무를 도독케 했다(都督諸軍事)ㅡ정사 조휴전


[220년에] 문제文帝가 왕위王位에 오르자 조진曹眞을 진서장군鎭西將軍[11]•가절假節 도독옹량주제군사都督雍涼州諸軍事로 임명하고 앞뒤의 공을 기록해 동향후東鄕侯[12]로 올려 봉했다.ㅡ정사 조진전


문제(文帝)가 제위에 오르자 평릉향후(平陵鄕侯)로 고쳐 봉하고(更封)하고, 정남장군 영(領-겸직의 의미) 형주자사, 가절 도독남방제군사(都督南方諸軍事-남쪽의 군무를 총괄하는 도독)로 관위가 올랐다.ㅡ정사 하후상전


문제(조비)가 젊어서부터 하후무와 친했는데, 즉위하자 안서장군 지절로 임명하고 하후연을 승계하여 관중도독에 임명했다.ㅡ위략


위나라가 천하를 소유함에 이르러 문제는 오질을 징소하여 더불어 거가에 타고 낙양에 돌아왔다. 도착하자 북중랑장으로 배임하고 열후에 봉했으며 사지절독유병제군사(使持節督幽, 并諸軍事)로 신도(信都)를 다스리게 하였다. ㅡ배송지주 오질전


문제가 왕위를 잇자 진동장군(鎮東將軍)으로 승진하였고, 작위는 무안향후(武安鄉侯)에 올랐으며 도독청주제군사(都督青州諸軍事)가 되었다. ㅡ정사 장패전


도독익형양주제군사 조인


도독26주제군사 하후돈>조휴


도독옹량주제군사 조진


도독남방제군사 하후상


관중도독 하후무


독유병제군사 오질


도독청주제군사 장패



군사국가화되어 있던 조위도 둔전 비중 줄이고 각지에 방계황족들 뿌려서 지방의 자체적인 대응력 높이는 동시에 중앙군 중심의 체계로 전환해가며 정상국가화 드라이브 밟았지



아들은 아버지를 닮지 않고 시대를 닮는다는 말이 있다. 한 개인의 재 능과 역량은 특정 세계와의 만남에서 빚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아 버지는 아들에게 결정적인 삶의 단서를 제공한다. 우리는 위문제(魏文 帝, 187-226, r. 220-226) 조비(曹丕)를 기억한다. 인간성이 매우 좋지 않다 고 평가받았던 그이지만, 전론(典論), 「오계중(吳季重)에게 보내는 편 지(與吳質書)」, 「연가행(燕歌行)」, 「부회부(浮淮賦)」, 「부용지에서 시를 짓 다(芙蓉池作)」과 같은 문장 속에 그의 혁신적인 시대감각과 진취적 형식 의 창조력, 지극히 상식적인 것에 대한 사랑 등이 모두 녹아있다. 조비 를 악한 인간으로 묘사한 최초의 인물은 진수(陳壽, 233-297)이다. 진수 는 촉나라 사람이다. 진수의 글에 주를 단 배송지(裴松之, 372-451)가 조 조의 나쁜 이미지에 불을 지폈다. 배송지는 인용한 사료 자체의 질은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사실성은 차치하고 진수의 문장에 비하여 읽기가 수월하고 재미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나중에 삼국연의(三國演義)의 탄생의 모태가 된다. 그런데 진수와 배송지의 비판적 인물 평가는 세설신어(世說新語)에도 그대로 이어지며, 오나라에서 작성된 조만전(曹瞞傳)마저 유통되어서 조조 부자의 이미지에 쐐기 를 박았다. 시대가 흘러서 삼국연의(三國演義)에 이르러서는 정도가 심해져 조조와 그 두 아들은 악 그 자체의 인간으로 형상화한다. 그렇다면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는 말은 도무지 맞지 않는 것이다. 특히, 조비의 글에 인간을 향한 사랑과 도덕에의 존숭이 그치지 않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조비라고 하면 우리는 전론이라는 책을 기억한다. 이 책은 중국 문학사에서 최초의 문학전론(文學專論)이다. 원래 24권으로 이루어졌으나, 대부분 유실되었고 「논문(論文)」 한 편만이 소명태자(昭明太子, 501~531) 소통(蕭統)이 간행한 문선(文選)에 실려서 살아남았으며, 「자서(自序)」와 「방술에 관해 논함(論方術)」까지 모두 세 편만이 겨우 전해진다.


「논문」의 내용은 놀랍도록 근대적이다. “타인을 평가할 때 먼저 자기를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1)라거나 “글의 본질은 원래 같은 것인데, 말엽이 다를 뿐이다.”2)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한다. 첫째, 타인이 기술한 문학에 관한 평가는 객관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글의 공용은 사회를 위한 것이며 체재(體裁)나 형식은 개인마다 다르므로 하나의 기준만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글은 기세[氣]가 주인이다.”3)라고 말해서 철학과 문학을 이은 최초의 사례를 남기기까지 한다. 또한,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가리켜 “경국지대업(經國之大業)”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영원히 살아남을 위대한 일[不朽之盛事]”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하나의 전론 파편을 살펴보자. 「방술에 관해 논함」이라는 글이다. 조비는 부친 조조가 황건적을 소탕한 후 앞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유사 황건적을 미리 봉쇄하기 위해서 전국에 산재한 방술지사(方術 之士)를 업하(鄴下)에 모두 모아 단속했는데, 이때 방술의 황당무계한 비상식을 모두 열거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상식의 세계만을 추구하도록 이끈다. 여기까지의 내용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조비가 낡은 관념을 타파하기도 하지만, 상식에 벗어나는 관념과 습관을 경계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조조의 작시 배경에 관한 문헌 고찰을 통한 사언시의 미학적 공헌 연구,이진명,2024-


문학사에서는 
문학 비평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장르도 개척했지




남정 때 찐빠낸 것 빼면 그야말로 그 아빠에 그 아들래미라 평가할 만한 군주인데 이상할 정도로 평가가 좆박은게 신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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