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전국에서 훈련이 가장 잘되고, 전투력이 가장 강한 용영, 연군은 직예에 주둔하던 회군(淮軍)과 직예연군(直隸練軍) 그리고 산동(山東), 성경(盛京)등에 주둔하는 북양연해지구의 해상방어임무를 담당하는 회군, 연군이었다. 그중 직예 천진일대의 주둔군이 최정예부대였다.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대응전략을 위해 직예총독 이홍장(李鴻章)은 청왕조의 이들 부대의 총규모를 점검해본다. 당시 중국육군의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홍장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북양지구의 회군, 연군은 다음과 같다:
직예: 천진노대, 마창, 소참, 북당, 대고등지, 및 고북구, 선화, 준화, 산해관등지의 회군성군(총통 衛汝貴), 성군기마대(총통 呂本元), 인자군(仁字軍)(총통 吳育仁), 무의군(武毅軍)(통령 聶士成), 직예연군(정정연군, 통영연군, 고북구연군, 보정연군등)(통령 葉志超)등.
산동연해: 위해와 유공도에 주둔하는 회군호군(통령 張文宣), 수군(綏軍), 공군(鞏軍)(통령 戴宗騫). 연대, 청도등지에 주둔하는 용영 숭무군(통령 孫金彪, 章高元)
성경: 여순구에 주둔하는 용영의군, 친경군(親慶軍)(총통 宋慶), 대련만에 주둔하는 회군 명군(銘軍)(총통 劉盛休), 그리고 대동구, 대고산 및 압록강변경지역에 주둔하는 봉천연군과 진변군(총통 左寶貴)
이상의 각군의 병력합계는 53,281명이다. 이들이 당시 중국에서 제대로 훈련된 정예부대의 전부이다. 그중의 절반이상은 포대요새를 방어하고 있어, 원정을 떠날 수 없었다. 뽑아내어 다른 곳으로 배치하여 전투할 수 있는 병사 즉 이홍장이 말한 '유격책응지사(遊擊策應之師)'는 실제 성군, 인자군, 무의군, 직예연군으로 총병력이 약 21,741명이었다.
이렇게 신, 구간을 오가는 여러가지 문제와 모순을 보면, 당시 근대화에 힘들어하던 중국의 모습을 축소판으로 보는 것같다. 인구대국인 중국에서 뽑아쓸 수 있는 야전유격부대의 병사수가 겨우 2만여명이라니. 일본의 야전사단 20여만명과 비교하더라도 생각하지 못할 곤경인 것이다.
지방재정능력이 부족하고, 너무 군대를 많이 가지게 되면 의심받을까 우려하여, 북양육군의 규모는 시종 제한적이었다. 이홍장도 관할하는 부대에 대하여 "영이 하나 더 늘어나면 부담이 하나 더 늘어난다"고 했다. 육군의 병력부족은 실제로 북양대신 이홍장으로 하여금 청일전쟁전에 개전을 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 망설이면서, 열강들이 개입하여 조정해주길 희망했던 내재적인 원인이다.
인구 4억의 청에서 가용 가능한 야전병력이 2만여 명임
당시 일본 육군 상비병이 20만이 넘던 것에 비하면 처참한 수준
괜히 이홍장 이 양반이 개전에, 그리고 교전에 소극적이던게 아녔음
'진짜 우리 좆됐다' 라는 속사정에서 나오는 필사적인 무브먼트였던것